온종일 걷고 싶은 밤이 있다.
늦은 밤까지 체육공원 운동장을 뱅글뱅글 돌았다.
산책할 때도 읽고 싶은 책을 싸들고 나서는 습관은 이미 오래되었다. 기름기가 낀 몸이 더부룩하여 온종일 걷고 싶은 밤이 있다. 나는 초록의 기운을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비 오기 전 흙냄새를 좋아하고 구덩이에 핀 꽃들을 관찰하는 게 나의 낙이기도 하니까 이런 걸 하면 또 기분이 좋아진다. 집어 든 책은 카뮈의 시지프 신화 (한 장 한 장 공부하듯 읽기에 진도가 참 안 나간다.)와 ‘동사의 맛’. 자살에 대한 글을 읽으며 잠시 멈춰서 생각하다가 살아 움직이며 변화하는 우리말의 귀여운 맛을 알리는 책은 모순적이지만 꽤 귀여운 조합이구나 싶어서 두 권을 선택했다. 활력을 띄고 살아있는 단어가 바로 동사라고 생각하니까. 자살에 대한 우울한 몽상을 동사에 기대어 희석시켜버리자. 그 말에 내가 맞춰지고 활력 있어지는 기분이 든다. 웃기면서도 귀엽고, 그렇다.
올해 초에 좀 뛰어보고 싶어서 달리기 카페에 가입했는데 아직까지 한 번도 달리기를 시도해본 적은 없다.
《아워 바디》
감독 한가람
출연 최희서, 안지혜, 김정영
개봉
2019.09.26
그냥 무작정 뛰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었다. 영화 ‘아워 바디’를 보고 나서 그 일은 확실하게 끌렸다.
특히 주인공 자영이가 지혜를 발견하고 전속력으로 질주하다가 마지막에 큰 울음을 터트리는 장면이 인상 깊기도 했다. 극한으로 몸을 몰아갔을 때 느끼는 쾌감, 그리고 오랫동안 묵혀왔던 감정 둑이 무너진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올해가 가기 전에, 여름이 다 가기 전에 꼭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요즘의 나는 이상하리만치 무표정한 얼굴로 살아가려고 하고, 웬만해선 우는 법 없이 자려고 하는데.
그러다 어딘지 모르게 답답해 올 시점이 오면 밀려오는 감정에 넘어질 때가 많다. 그러다가 발을 잘못 헛디디기라도 하면 그 날은 어떤 행위로든 제어가 잘 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지난해 씨네아트 리좀에서 보지 못했던 아워 바디를 보게 됐고, 오랫동안 이 장면은 길이길이 내 마음속에 남게 된다. 나도 자영이처럼 달리기를 배우고 싶다. 이왕이면 오래오래 도망치는 연습을 하다가 나를 만나고 싶다.
저녁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어두워진 지름길을 피해 조금이라도 더 걷고자 돌아오는 동네 골목 어귀를 천천히 둘러왔다. 그러자 산책할 때 가보았던 (내가 좋아하는) 카페 '몽 루아'는 문을 이미 닫았고.
책을 읽을 장소는 이제 마땅치 않다. 공원의 벤치나 놀이터에 가고 싶지만 저녁의 불빛을 받으며 담배연기를 피워 올리는 건장한 청년들의 모습에 기가 죽어 자리를 얼른 뜨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까뮈의 글은 서늘하고 어려운 주제를 지녔는데 가로등을 스탠드 삼아 읽기에는 역부족. 집으로 그냥 털레털레 돌아왔다.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걷게 된다. 양쪽 귀에 꽂아놓은 이어폰에서 추억의 노래 메들리가 나오고 있지만 생각은 자꾸 앞날을 향해가고 미래에 대한 걱정들이 갑작 훅 끼쳐온다. 그러던 순간 내 옆의 가로등 불빛이 반짝. 하고 빛을 냈다.
마치 나의 존재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나는 사실 이렇게 별 것 아닌 것에 자주 감동하는 사람이라는 걸 새삼스레 다시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