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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같은 하루

3월에 쓴 어떤 날.

by 이단단


저녁 여덟 시 반, 배가 고프지는 않지만 무언가 허기지고 있다는 생각에 사놓았던 레몬맛 맥주캔을 따고 짜파게티 라면을 끓여먹는다. 요즘 들어 맥주와 같이 보내는 날이 많다. 옆에는 늘 항상 그렇듯 책 한 권이 놓여있고.



나는 지금 박연준 작가의 [모월 모일]을 집어 들었다. 첫 문장이 맥주와 함께 넘어가니 기분이 좋다. 나의 부산한 움직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켜 두었던 블랙체리 캔들의 심지에 붙어있던 불이 함께 일렁인다.





시작은 권여선 작가의 소설 [레몬]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나는 레몬과 함께하기로 마음먹은 것 마냥 레몬에 관련된 것들을 찾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하는 일도 레몬 버베나 향초를 키는 것이었고, 사탕을 집을 때도 공연히 레몬 맛 사탕을 집어 들게 되었다. 꽃을 검색해볼 때도 아주 쉽게 레몬을 붙여 레몬 꽃을 검색해보곤 하는 식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소설에 그려진 레몬 한 덩이가 강렬했던 탓이었을까. 아니면 일,집,일,집을 반복하여 심심하거나 비린 것 같은 내 인생에 잡내를 없앨 것을 찾던 도중에 그것에 끌린 것이었을까. 나는 상큼한 것이 자꾸만 끌렸고 또 삶은 자꾸 그것을 찾도록 나를 이끌었다.


오늘 오전까지 나는 또 하나의 인연을 정리했다. 어떻게 하다가 책을 알고,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지만 그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만 끊임없이 쏟아내는 일방적인 사람으로 점점 변해가고 있었다. 나는 그런 사람을 무지 싫어한다. 3월에는 그렇게 싫어하는 사람을 한꺼번에 둘이나 만났다. 그렇게 한꺼번에 와버리면 정리해야 하는 나도 버거운 법이다. 좀 나를 버겁게 하는 사람들은 천천히 한 명씩 왔으면 좋겠는데 인생은 아이러니하게 이런 사람을 둘 아니면 셋씩 겹쳐 보내곤 했다.


그래서 나는 혹여나 감정을 더 질질 끌지 않기 위해 서둘러 그 사람을 차단했다.


그러고 가만히 있다가 햇볕이 좋아 볕을 쬐러 바깥으로 나왔다. 누워서 미적거리고 있는데 마침 동네 서점에서 주문한 책들이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박연준 시인의 산문집 [모월 모일]과 은희경 작가의 [빛의 과거]를 주문했었다. 물론 그 책과 다른 책들도 무진장 사버렸지만.



책을 보고, 책을 사고 나서 두둑한 글들을 어깨에 메고 거리를 걸었다. 휴일에는 이유 없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이유 없이 그냥 거리를 걸었고 문득 가보고 싶은 카페가 생각 나 그곳으로 향했다. 이유 없는 취향에 이유가 생긴다면 '문득'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낫겠다.

가던 도중 전봇대를 무심코 봤는데 거기에 음식물 쓰레기통이 놓여 있고 이름 모를 보라색 꽃이 펴 있었다. 음식물 쓰레기통이 있을 자리에 꽃이 핀 건가, 꽃이 핀 자리에 음식물 쓰레기통이 눈치 없이 서 있는 건가. 그걸 가지고 한참 재밌는 생각을 했다. 내 삶도 원래 뿌리내릴 자리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 서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눈치 없이 서 있는 것인가.


안 그래도 내 본업을 가지고 내가 감히 가질 수 있는 영역인가, 아니면 속히 그만두어야 할 자리인가 계속 생각해보고 있었던 참이었다. 나에겐 간호사라는 직업은 참 모순적인 직업이다.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더 지속해나가기 힘들다고 생각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성숙해져서 앞으로 더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이런 생각도 나에겐 레몬이다. 이렇게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가 내가 잠시나마 특별하다 느끼게 되는 순간은 이렇듯 생각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지겹고 비릿한 인생에 상큼한 그것이 되어 줄 레몬. 그러니 나에게 생각을 멈추라는 말은 그저 입 다물고 네네 하며 세상을 살아라. 고 압박하는 말 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이런 조그만 생각에도 자유를 느끼는 사람이니.


카페에 가서 주문한 아인슈페너를 시킨다. 최근 맛을 들인 '밤하늘'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인슈페너다. 밤하늘처럼 어두운, 씁쓸한 맛을 지닌 티라미수를 달콤한 맛인 크림이 감싸고 맛을 보완해준다. 그렇게 달콤한 시간이 끝나면 바로 씁쓸한 에스프레소 커피의 맛이 뒤따라온다. 지난 에세이집에서도 썼지만 나는 아인슈페너, 그러니까 플랫화이트를 마시면서 인생의 층계를 깨닫는 것을 좋아한다. 씁쓸해지면 달콤함이 뒤따라오고, 달콤한 것은 또 얼마 못 가서 다시 씁쓸해지는 것.


이 얼마나 인생의 맛과 비슷한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당장이라도 권하고 싶을 지경이다.



카페의 풍경을 카메라로 담기 시작했다. 적당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 포근한 실내의 온도, 밖에 나갔을 땐 몰랐지만 계속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으니 그제야 제법 뜨거운 햇살이었다 느껴진다. 그 모습을 풍경삼아 딱 붙어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이 내 앞 뒤로 모여들었다. 사랑을 머금은 사람들은 어떻게 싸우는 모습마저도 아름다웠고 사랑스럽다. 지독하다는 마음으로 커플들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한 자리에 시선이 닿았다. 나와 같이 혼자 앉아 있는 남자의 등이 보였다. 무심하게 책을 펴 글을 읽고 싶었지만 왠지 자꾸만 시선이 그곳으로 머물렀다.

오전까지 새로운 사람은 다시 만나지 않겠노라 다짐했건만 결국엔 사람이 그리웠나 보다. 자꾸 그에게 말을 걸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커플 사이에서 혼자 섞여있지 못한 그 사람을 보면서 우리도 같이 둘이 되어보자 하고 싶었다. 마음이 너무 간질거렸지만 당연히 그러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땐 맨 정신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저 먼 곳에 반쪽을 두고 왔는지도 모를 일이지. 나는 또다시 두려움이란 옷을 입고 그 남자를 보내버렸다. 카페인에 취약한 나였지만 그래도 술보다 커피에 취했다는 말을 믿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싶어서 더 머뭇거린 것도 있었다. 쳇, 그렇지만 그러기에 나는 당신에게 말을 걸고 싶었고, 그저 말을 걸고 싶었다고 했지만 그러기엔 너무나도 진심이었는데. 지금은 진짜 술을 마셨지만 카메라에 우연히 같이 담긴 그 사람의 등만 물끄러미 마주하기만 할 뿐이다. 이제 더 이상 말을 걸 수가 없다.





저녁 여덟 시 반, 배가 고프지는 않지만 무언가 허기지고 있다는 생각에 사놓았던 레몬맛 맥주캔을 따고 짜파게티 라면을 끓여먹는다. 또 레몬이다. 비린 것의 잡내를 없애줄 레몬, 상큼한 줄로만 알아서 음료수인 줄 알고 많이 얕봤다. 지하주차장에 세워둔 차 안에서 급하게 먹고 집에 들어왔다가 뒤늦게 올라온 취기에 그렇게 혼이 나고 말았다.

그런데 또 시간이 지나 가라앉으니까 또 술이 당긴다. 내가 사람에 고통을 느끼면서도 또 사람을 찾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맥주와(취기와) 같이 보내는 밤이 많아졌다. 옆에는 늘 항상 그렇듯 책 한 권이 놓여있고.


박연준 작가의 [모월 모일]을 집어 든다. '여름밤은 익어가기 좋고...' 첫 문장이 맥주와 함께 넘어가니 기분이 좋다. 나의 지난여름이 생각나서. 그땐 참 희망에 부풀었었는데... 이제 막 산책과 독서의 재미에 불을 붙이고 여기저기 싸돌아다녔었는데.

나의 부산한 움직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켜 두었던 블랙체리 캔들의 심지에 붙어있던 불이 함께 일렁인다. '겨울밤은 깊어지기 좋다.' 이 문장에 그렇지, 고개를 주억거린다. 경칩이 지났지만 아직 나에게 이 밤은 겨울밤이라 참 공감이 가는 문장이다. 그러다가 바로 다음에 온 '봄 밤은 취하기 좋고.'에서 남은 맥주를 아예 후루룩 들고 마셨다. 이유는 없지만 그저 취하기 좋다는 말에 훌쩍 다가온 봄의 온기를 깨닫는다. 마음은 겨울에 머물러 있지만 계절을 깨달아야 하니 이렇게 취하는 날이 많아졌나 보다. 이번 봄은 레몬과 함께 보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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