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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도망지

나만의 작은 위로

by 이단단


살다 보면 한 번쯤 도망 칠 일이 생기는 것 같다. 쉬어 감을 핑계로 회피해버리는 일 말이다. 바로 내가 그렇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부터 돈과 걱정을 벌기 시작하니까 이틀을 내리 쉬는 날이 걸리면 그날은 무조건 (당일치기라 해도) 어딘가로 훌쩍, 여행을 떠나는 날로 정해보자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도망치는 버릇은 습관이 들었다.


내 마음이 갑갑하다는 이유로 다른 이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어버리며 훌쩍 어딘가로 떠나게 되는 것이다. 이럴 땐 폰도 잘 보지 않으니 주변인들은 당황하기 시작한다. 나를 좀 잘 아는 사람은 대충 '이 녀석. 도망갔구나.' 하는 느낌에 화를 누그러뜨릴 것이고, 나를 아직 잘 모르거나 이제 조금 알아가는 중인 사람은 '얘 갑자기 왜 이래?' 하는 소리를 내뱉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나만의 도피처를 찾아 떠난다. 전국 팔도 중 나의 집과 한 시간 남짓 걸리는 부산은 이미 나의 도피처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하도 많이 도망을 다녀서 이제 우리 옆 동네라는 느낌까지 들 정도.


올해도 어김없이 이런 모습으로 도망을 간다. 이미 추억이 되어버린 옛날 노래를 틀고서, 직장에서 조용한 나는 어느새 소심하게 반항을 하며 시건방져지는 것 같다. 락 밴드의 노래라든지 평소에는 잘 듣지 않던 빠른 비트의 댄스 음악이 주를 이루어 나오는 이어폰을 귀에 꽂아 볼륨을 최대한으로 틀어놓고, 자세도 편하게 잡는다. 그러니 어딘지 모르게 껄렁해지는 느낌이 든다. 세상의 소리를 지워버린 채로 그렇게 터덜터덜. 설렘의 가벼움과 챙겨 온 짐과 그동안 가져다닌 걱정의 무거움에 낑낑대면 바다에 도착한다. 이렇게 시작한 나의 도착지이자 도망지(逃亡地)는 언제나 바다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도망가기에 적합한 장소는 바다만 한 곳이 없다고 생각한다. 어쩔 땐 모든 것을 다 휩쓸어가는 무서운 존재이기도 하지만, 하늘빛에 따라 시시각각 인상이 변하는 바다는 오늘 다행히 맑은 하늘을 받아 윤슬 거리며 부서진다. 시원한 파도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소리. 이 바다가 오늘의 내 고민도 밝은 색색의 조각으로 부숴줄 것만 같다.







나는 새로운 것에 대한 걱정이 많다. 내가 이렇게 자주 도망 같은 여행을 가는 이유는 사실 걱정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라기보다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기 위해서 떠나는 이유가 크다. 변화에 적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낯선 곳에서 들어왔으나 곧 그 지역 사람인 것처럼 그곳에 발자국을 조용하게 묻히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억지로 발을 떼보곤 하는데, 그것이 남들한테는 마냥 여유 부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같다. 엄마는 지금도 내가 어딜 나간다는 소리만 하면 제일 먼저 '이 시국에 팔자 좋네.'라고 타박한다. 나는 사실 누구보다 마음이 조급한 사람인데 말이다. 엄마는 종종 딸의 마음을 몰라주는 방법을 터득한 것만 같다. 금방 떠나버릴 것 같은 지금 이 시간, 지금 이 청춘, 이 20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놓치기 싫은, 그렇다고 선뜻 나서지는 못했던 그 시간을 딸이 얼마나 아까워하고 후회하고 있는지 아마도 엄마는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여행을 하기 전, 도망지를 찾기 전, 나는 나를 늘 불안정하고 겉보기보다 약하며 언제든 손을 놓아버리면 깨질 수 있는 유리같이 아슬아슬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봐도 이런데 다른 사람은 나를 얼마나 불안정한 사람이라 생각할까 싶어서 학교 공부를 마치거나, 졸업 후 입사한 병원에서 퇴근하면 바로 집으로 들어가 다음 일정이 있을 때까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왠지 이런 마음을 들켜버리면 누군가 나에게 상처를 크게 줄 것 같은 느낌이 두려웠다. 그런 세상의 무서움과 단절시켜주고, 마음에 안정감을 주었던 건 집 밖에 없었다.


나는 거제도에서 보냈던 십일 년간의 학창 시절을 통해. 내 또래들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소통하는 법보다 선 긋는 법을 먼저 배웠고, 언제 끝날 지도 모르는 친구들을 사귀느니 차라리 혼자를 기르는 법을 택한 아웃사이더 기질이 다분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사람을 아예 싫어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는지 배척한 만큼 외로움에 우는 날도 잦았다.


어떤 날은 내 고민을 듣던 언니가 답답해하면서 잔말 말고 당장 나가서 친구들이랑 늦게까지 술도 먹고 놀아보라고 등을 떠밀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아무래도 내 또래 애들이 좀 무서웠다. 왠지 그들의 취향에 내가 맞지 않을 것 같아서, 또 배척당하면 어떡하지. 혼자 끙끙 앓는 시간 속에 마음 속 상처가 짓무르기도 해 고름이 흘러 넘칠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누군가와 상호작용을 하고, 의사를 소통해야 하는 번거로움은 가만있어도 나를 피곤하게 했다. 그래서 나가는 것을 기피했던 것도 있었다.


그러니 성인이 되어 여행에 더 집착하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혼자를 기르는 힘에 나는 여전히 중독되어 있는 것 같다. 사람 사이에서 내가 언제 어디서 실수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것 때문에 또다시 배척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나 때문에 누군가가 위험에 빠지거나,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죄책감에서 빠져나와 다시 일어서는 느낌을 꼭 느껴보고 싶었기에. 또 신기하게도 여행을 다녀오면 몸도 정신도 개운해져서 일이든 대인관계든 뭐든지 조금은 잘했던 것 같으니까. 정말 이기적이지만 과거의 나는 죽었으니 다시 태어나 새로워진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 순수한 백지상태라고도 믿고 싶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훌쩍 떠났다가 돌아와 새로 만난 사람처럼 뻔뻔하게 다시 시작해 볼 수 있다고 믿고 싶었기 때문에 여행에 더욱 집착하는 것 같다.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한, 성장이라는 과제를 안고 사는 어린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시인하는 꼴이 되겠지만.) 그래도 어딘가에 내가 서서 편하게 웃음 지을 수 있는 땅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싶어서 오늘도, 그다음 휴무 때도, 그다음에도 나는 '안으로'가 아닌 '밖으로' 나선다. 진득하게 한 곳으로 뿌리를 내리지는 못하더라도 자주 가다 보면 그곳이 나를 기억해 주지 않을까. 혹은 그곳으로 나아갈 때 만났던 도로와 흙과 나무와 바람이 나를 기억해주지 않을까.


평생 불행한 일이라고는 겪고 싶지 않은 게 인간의 바람이지만, 그래도 겪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나의 도망지는 어쩌면 위로지(慰勞地)가 되는 셈이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가방 하나에 책 한 권을 넣어놓고 노트북과 함께 새롭고 힘들 나만의 여행지로 힘차게 걸어간다. 나만의 작은 위로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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