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에게 배우다.
오늘따라 유난히 힘들었던 병원 근무에 지친 나는 차가운 맥주와 위로가 되는 글이 절실하다. 보통 저녁 근무를 하는 날이면 바로 잠자리에 들지만, 하루를 만족스럽게 보내지 못한 느낌이 들면 괜스레 침대를 멀리하곤 한다.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 그렇게 스탠드 조명 하나에 의지한 심야 독서가 시작된다. 숨죽이며 다가오는 새벽을 때우려면 책만한 게 없으니까.
오늘 심야 책은 예전에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가 큰 감명을 받고 다시 구입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고독의 즐거움>이라는 책이다. 소로의 글은 차가운 현실에서 길을 잃은 도심 속 영혼에게 단맛 나는 위로를 건네주고는 한다.
그러나 책만 읽으니 뭔가 허전하다. 시계를 보니 자리를 펴고 앉은지 10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괜히 뭔가를 입에 넣고 싶어지는 심야시간. ‘다이어트-!’를 외치는 내 안의 목소리와 싸우다가 잠시 두 눈을 감고 욕망을 실천하기로 한다. 그 과정에서 늦은 밤 방 안에서 초콜릿과 맥주를 곁들여 먹게 됐다. 문제는 이 때부터 시작 되었다.
나는 무심코 초콜릿의 한 조각을 집어 올렸고, 책에 다시 몰입해가기 시작했다. 소로가 나에게 충고하는 말이 길어지면서, 또는 그의 말에 나의 부끄러움이 늘어가면서 뺨은 계속 붉어지고. 몸의 열기는 데워졌다. 자연스럽게 먹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손에 잡은 초콜릿이 녹은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책장을 넘기는 순간, 책의 가장자리에 갈색의 얼룩을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 날 새로 산 책 이었는데, 보자마자 애착이 많이 들었던 책이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처음 그 상태로 보관하려고 책등에 줄도 안접히게 조심히 봤던 책인데, 이런 배설물 같은 색의 얼룩을 묻혔다니. 가슴이 쓰리기 까지 했다.
황망한 마음으로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보니 이럴 땐 책 종이에 물파스를 바르는 게 최고란다. 늦은 밤 부산을 떨어가며 찾아서 발랐더니 얼룩이 사라지기는커녕 이번에는 파스 냄새까지 추가가 되어 더 망가져 버리고 만다. 당장 눈앞의 때를 없애겠다고 무작정 덤볐다가 더 망가트려 버리고 만 꼴이 되었다.
이제는 파스 냄새까지 나는 책을 상심한 채로 바라보았다가, 안절부절 했다가, 몇 분간 혼잡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나는 창문으로 갔다. 손에 든 얼룩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어리바리한 짓을 했다는 생각에 짜증이 치밀기도 했다.
마음의 무게 때문일까? 가로등 사이를 간간히 지나가는 도로에서 나오는 차들의 불빛과 밤의 그늘이 더욱 짙어 보인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 속 흉터도 이 얼룩에 비유한다면 할 수 있을까.’
찰나의 순간이었다. 밤과 함께 짙어지는 교회 십자가 불빛만큼 마음이 짙어졌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마음 속 흉터도 어쩌면 이 얼룩과 똑같지 않겠냐고.
이미 묻어버린 얼룩은 묻어버린 채로 체념하면 될 것이고, 어차피 세월에 자연스럽게 닳아 버릴 것은 닳아 버릴 것인데 지금은 그럴 타이밍이 아니 라며 억지를 부리며 지우다가 더 망가뜨려 버린 지금. 이 행동은 어쩌면 상처를 씻어내려 발버둥 치다가 더 깊은 마음 속 상처를 내고 말았던 내 모습과 참 비슷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망쳐버린 것들에 꽤 적응을 했다. 이제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할까봐 불안해하지 않고 완전히 새것으로 돌리기 위해 악 쓰지 않는다. 그것은 책도 그렇고 내 마음에도 해당되는 일이다. 이제는 어딘가에 묻은 얼룩만 보기보다 그 옆의 아직 때타지 않은 깨끗한 큰 부분을 보고 안심하려고 노력한다.
군데군데 멍이 들고 상처가 나서 망쳐버렸다고 생각한 과거. 하지만 앞으로 다시 채울 새 것-미래- 의 부분이 더 크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 지니까. 이것은 아마도 소로의 글을 읽었기 때문이겠지.
내 마음의 얼룩은 앞으로 이런 책들과 함께 이렇게 적응을 해 나가지 않을까. 비록 지금 이 소로의 책 보다 내 가슴에 얼룩 진 곳이 더 많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나. 어딘가에는 아직 깨끗하게 남아있는 새 공간이 있겠지. 아직 나는 앞으로 새로 쓰일 공간이 더 많이 남은 사람이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 괜히 내가 앞으로 행복해질 것만 같은 좋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