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소 Mar 11. 2024

불안하지 않은 남자를 닮아가는 중입니다.

불안이 많던 나는 불안하지 않은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대학시절 나는 기숙사에 살았다. 기숙사 근처에 비디오 가게가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가게 앞에 작은 좌판이 생겨났다. 좌판에서 팔기 시작한 것은 고기와 야채를 같이 볶아 빵에 끼워 먹는 버거. 고기 볶는 향이 어찌나 좋았던지 길을 지날 때마다 나도 그냥 갈 수가 없었다. 맛도 맛이지만 버거의 가격은 단돈 천 원. 주머니가 가볍던 학생들은 버거를 먹는 동안 주인아저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나중에 그곳은 학생들의 '심야식당' 같은 곳으로 유명해졌다.

학교를 졸업하고 어느 날 TV에서 버거집 아저씨를 보게 되었다. 가게가 생각보다 커져서 전국에 프랜차이즈까지 생겨났다는 소식. 그런데 그 엄청난 성공 신화의 주인공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한 번도 행복해 본 적이 없어서 뭔가 잘된 순간에도 불안하다고. 불행이 곧 닥쳐올 것 같아서 지금을 즐기지 못하겠다고.

그 말이 내 머리를 쿵하고 울렸다. 아저씨처럼 성공한 무엇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곧 불행이 닥쳐올 것 같아 지금을 즐기지 못한다는 말이 너무 공감되어서. 나는 스스로를 별일이 있어도 없어도 불안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를 아저씨가 나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자 감춰져 있던 나의 불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불행은 반드시 나를 찾아오기로 약속된 것 같았다. 다만 언제 올질 모르니 매일을 불안해했다.

아이가 조금이라도 아프면 나는 최악을 상상하며 앞서갔다. 아이가 건강해지면 다시 아플까 봐 웃질 못했다. 어쩌다 강군에게 힘든 일이 생기면 당사자보다 더 걱정이 되어 밤잠을 설쳤다. 강군이 큰 걱정 없이 잘 지내도 나의 불안은 묘하게 지속되었는데, 아마도 나에겐 '마냥 행복했던 기억'이 없었기 때문일 거다. 고요한 시간은 그저 폭풍전야라고 믿었으니까. 왜 그런 성격이 되었는지 나의 성장 과정을 되짚어 따져 묻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나는 언제나 발이 공중에 살짝 떠 있는 사람처럼 불안했고, 곧 고꾸라질 것처럼 매일을 긴장하며 살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불안해?"

아이를 볼 때마다 유독 불안해하던 내게 강군이 물었다.

"나는 자꾸 최악을 상상해. 그리고 그 상상이 실제로 일어날까 두려워."

그는 불안이 많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때보다도 차분한 말투로 답했다.

"네가 상상하는 일들이 실제로 다 일어난다고 쳐. 그럼 그때, 내가 같이 죽어줄게!"

같이 죽어준다는 말이 어느 정도 진심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엔 꽤나 진지한 맹세처럼 들렸다.

( 나중에 몇 번 되묻곤 했는데, 자신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저 순간적인 기지가 아니었을까. 흐흠 )


진실이 무엇이었든,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그 후로도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상상의 끝에 '죽음'을 가져다 놓았는데, 그토록 두려워 마지않는 순간에 기꺼이 나와 죽어주겠다는 사람 하나가 있다는 게 이렇게 큰 위로가 될 줄이야.  '그런 생각하지 말고 같이 잘 살아보자!'라는 말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내가 상상하는 최악의 결론에서 우린 각자의 길로 걸어가고 있지 않았을까.


그 후로 나의 불안은 조금씩 가라앉았다. 지금도 나의 상상이 한 번씩 앞서가려 할 때가 있지만, 그때마다 눈앞에 있는 가족이 더 많이 보인다. 스스로 성장해 나가며 뿌듯해하는 아이, 대체로 유쾌하지만 위기의 순간엔 어느 때보다 진지해지는 남편이자 이젠 친구이기도 한 강군. 그렇게 내 상상은 먼 곳이 아닌 '지금'에 집중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불안하지 않은 남자를 점점 닮아가고 있는 중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