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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영 Jul 19. 2023

우파니샤드 읽는 배달원

누워있는 남자 

1.

명상을 한 지 3년 남짓 됐다. 정확한 방법도 모르는 채 호흡을 조절하고 머릿속에 큰 용광로를 만들어 넣어 떠오르는 잡념들을 하나씩 제거하는 식으로 명상을 시작했다.      


초반에는 명상의 효과를 몸 이곳저곳에서 일어나는 반응들과 꿈 등을 통해 새로운 재미를 느꼈으나 이러한 것도 계속 쌓이다 보니 지루한 침체기를 맞이하였다. 나는 무언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지 않는다. 예전에는 시도 했으나 최근 2년 정도는 그러려니 하고 나를 방치하고 일어나는 현상들을 무시했다. 그러다 보니 게으른 관성도 생겨 새로운 시도를 못 하는 중이다. 


그러다 최근 인도 고전에 관한 지대한 관심이 생겨 읽어보는 중이다. 인도의 3대 경전 베다, 우파니샤드, 바가바드기타 중 베다는 예전에 읽었고 두 번째는 우파니샤드, 세 번째는 바가바드기타로 자연스레 넘어가기 시작했다.     


우파니샤드는 산스크트리어로 upa (가까이), ni (아래로), 샤드(shad)는 앉는다는 뜻이다. 즉 '스승의 발밑에 앉아서 전수받은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이어 바가바드기타는 '거룩한 자의 노래'라는 뜻을 갖고 있다. 


우파니샤드가 형성된 시기는 인류의 역사에서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 시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신의 꽃이 활짝 핀 시대이다. 칼 야스퍼스는 이 시기를 인류 정신의 축의 시대 (Axial Era)라고 했다.      


이 시기에 중국에서는 노자, 장자, 공자, 맹자, 순자 등이 나왔고, 그리스에서는 탈레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나왔으며, 인도에서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우파니샤드의 현자들과 붓다와 자이나교의 시조 마하비라 등이 나왔다. 이스라엘에서는 이사야와 예리미야 등 기라성 같은 예언자들이 나왔으며, 이란에서는 짜라투스트라가 나왔다. 아마 제각각 흔들리던 여러 개의 시계 추가 서로 공명하여 동일한 진동으로 흔들리듯, 그 시대에 지구를 둘러싼 의식의 흐름이 그러했던 모양이다. 


우파니샤드는 저자가 알려진 바 없다. 누군가의 스승의 스승이 끝을 따라가 보면 브라만이 나온다. 주요 개념은 브라만, 아트만, 푸루샤, 다르마 등이 있다. (아트만은 존재의 본질, 참 자아 / 브라만은 세상의 참모습, 창조의 원리 / 마야는 환영/ 다르마는 의무, 책임 / 푸르샤는 순수의식, 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고대인들이 그러했듯 초기 베다 시대에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호기심으로 출발되었던 물, 불, 바람, 태양과 같은 자연의 힘을 형상화하여 신으로 숭배하고, 이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방식에 관한 의식이 주를 이룬다면 우파니샤드는 베다의 사상을 계승하여 인간 (아트만)에 대한 사색과 통찰 그리고 본질에 관한 성찰에 관한 것이다. 


붓다는 우파니샤드의 정통한 고수였지만 참 자아 즉 아라한의 세계를 넘어 인류 모두가 고통의 바다를 건너길 바라는 마음에 철학적 관념을 더 넓게 풀어준 거라 나는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철학은 작은 바퀴를 뛰어넘어 현재 큰 바퀴로 인류에게 큰 사랑을 안겨줬다. 또한 경전의 내용 중 구약과 신약 그리고 노자와 장자의 철학과 굉장히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으니 앞서 칼 야스퍼스가 말한 축의 시대라는 표현을 이해할 수 있다. 


명상 그리고 이러한 세계 종교들의 경전을 읽으면 읽을수록 좁은 종교의 틀을 벗어나 세계관이 거대하고 다양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으며 이러한 배움들은 나의 삶에 적용시키고 있다. 

2.

힌두교의 주요 덕목 중 하나인 다르마는 우리말로 표현하면 의무, 규범, 법이라는 뜻이 적용된다. 인도 국기의 상징인 수레바퀴는 전륜성왕이라고 불리는 아소카 대왕의 전차 바퀴에서 유래되는데, 다르마의 가치가 상징화된 문양이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의 다르마는 돈을 벌고 자신, 그리고 가족들에 대해 책임을 다하는 것일 것이다. 나의 다르마는 돈을 벌어 나 자신을 보호하고 더불어 같이사는 고양이  물루를 건강히 잘 지키는 것이 1순위며 2순위는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며 3순위는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오토바이 배달일(코로나 때문에 생계가 무너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 그리고 친구 등에 대해 생각하며‘다르마'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의 다르마는 무엇일까? 사회적 거리두기를 장려하는 이 시대, 고객들의 소중한 음식을 빠르고 안전하게 가져다 주는 것이 나의 의무일까? 사람들이 ’딸배‘라고 손가락질을 해도 묵묵히 나의 먹고사니즘을 해결함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식‘을 해결해주는 아주 고마운 직업이지 않을까 하며 낮아진 자존감을 스스로 위로한다.      


서울이라는 공간은 하루 벌어 먹고사는 이들에겐 무참한 실패의 공간이다. 1인 가구로서 살아가는 나에게는 서울에서 가족이라는 정서적 공간을 꿈꾸지만, 그 작은 소망마저도 이제는 큰 소망이 아닐까 한다. 인류애가 사라진 공간으로 가고, 결국은 골목 끝으로 간다.      


'라면을 끓이며'라는 수필을 쓴 김훈 작가가 말했듯, 먹고사는 것의 비루함은 어느 직업이든 다 있다. 도로 위의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현재의 나의 삶과 125cc 오토바이로 내가 누비는 서울이라는 공간은 개개인이 바라보고 느낀 점은 다 다를 것이다. 


존재니 비존재니 하는 어려운 범아 일여 같은 이야기는 집어치우더라도 잣대 없이 넓은 세상을 바라보며, 갇히지 않으며 올바르게 보는 것으로도 현재 삶의 이유는 충분하다.      

잘 버티자.             

        

3.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생계가 막막해짐으로써 하던 일을 잠깐 그만두어야 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니 뭐니 하는 전국민이 서로를 경계하고 한 공간 안에서 만나게 하는 것을 국가에서 금지 시켰던 시절, 나는 배달일을 했다.      


점심시간이 시작되기 한 시간 전에 슬슬 나와 서촌에 있는 청운 초 옆 담벼락에서 나는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배달 앱을 키고 ‘on’모드를 켠다. 수분이 채 안 지나서 근처에 있는 식당들의 콜이 따ᅟ근다. 여러 개의 콜 중, 돈도 많이 주고 목적지도 괜찮은 곳이 나오면 그것을 잡는다.      


그렇게 정신없이 돌다보면 어느새 오후 1시 정도가 되어있고 이때 운이 좋으면 대략 10만원 정도를 번다. 이후 20-30분 정도 배달 일을 더 하고 마지막 콜은 집 가는 방향으로 잡으면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처럼 오전오후 일과는 제법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갈 수 있다. 집에서 씻고 낮잠을 잠깐 잔 뒤 5시 무렵에 다시 처음의 장소로 가 저녁 피크 시간을 기다린다. 이렇게 비교적 단순한 나의 하루는 몇 달간 이어졌다.      

4.

나는 배달일을 할 때 최대한 깔끔하게 옷을 입는다. 크리드 향수를 뿌리고, 옷은 세미 정장 스타일로 웬만해선 입고 나간다. 힌두교에서 말하는 다르마라는 이유가 첫 번째라고 말을 하고 싶지만 사실은“나 배달하는 사람 아니에요”를 어필하고 싶은 이유가 더 본질적인 속내이다. 오토바이도 혼다나 야마하 같은 가성비 스쿠터가 아니라 중고 베스파를 선택한 이유다. (한심한 놈)     


하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면 최대한 진실하고 정중하게 그리고 나의 일에 최선을 다해서 배달을 한다. 나시티에 반바지 입고 쪼리 신고 담배를 물며 배달을 하지는 않는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내 품위는 내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배달일이 전업이 됐던 2-3개월간 나의 다르마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있다. 작가일까? 배달원일까? 현재는 배달원이다. 그럼 배달원의 덕목은 무엇일까? 고객의 음식을 최대한 빠르게 그리고 전달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기분이 서로 좋을 수 있게 식당 주인들이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의 품질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따뜻한 마음과 함께 나의 손님들에게 전달을 하는 것이 나의 다르마다.     

 

그렇다면 현재 왜 배달 일을 할까? 과거에 열심히 살지 않은 죄, 즉 카르마, 때문이다. 가끔 일이 고되고 또 온갖 무시를 당할 때 영화 ‘빠삐옹’의 한 장면이 생각이 난다. 고된 수용소 생활에 지친 주인공은 잠을 자다 꿈을 꿨는데 재판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인생을 낭비한 댓가로 너의 죄는 유죄!”        


  

배달 일을 하면서 서울의 참 많은 곳을 여행을 했다. 인왕산과 북악산을 연결하는 숲길, 신라호텔 옆 장충단 성곽 길 등 드라이브 하기 좋은 길도 제법 만난다. 종로와 광화문을 중심으로 하는 구도심과 강남을 대표로 하는 (비교적) 신도심은 많은 차이가 난다.      


확실히 배달 일을 할 때에는 바둑판처럼 정교하고 왕복 8차선인 강남이 훨씬 수월하다. 하지만 새로 지어진 주상 복합 아파트와 같은 새로운 주거공간에 들어갔다 나오면 30분이 그냥 넘어간다.      

오토바이를 멀리 주차하고 걸어서 들어간 다음에 입구를 지키는 경비원에게 나의 신상 정보와 방문 목적 등을 알려주고 난 다음에 드디어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에 이런 종이가 붙여져 있는 걸 발견한다.     


‘배달원, 택배기사는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탈 것’     

이것을 보면 마틴 스콜세지의 ‘갱스 오브 뉴욕’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No Irish, No dogs’     


약 200년전 게티스버그에서 링컨이 유명한 연설을 한 이래로 민주주의의 가치에서 핵심인 ‘평등’이라는 말은 사실 거짓말이라는 걸 누구나 다 안다. 30만년 전 호모사피엔스가 등장한 이후 아니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시절 아니 더 들어가 미토콘트리아가 해저에서 꿈틀거리던 시절에도 집단에서는 평등이라는 것이 없었다. 조그만 사회 안 에서도 계급이란 있었다.      


자신의 음식을 픽업하러 온 배달원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음식점 사장 그리고 자신의 입주민에겐 한없이 정중한 태도를 보이며 90도로 꺾어서 인사를 하지만 하얀 비닐봉투를 들고 헬멧을 쓰고 들어온 배달원들에겐 마치 김일성처럼 군림하는 경비원들.      


도로위에서도 역시 카스트는 존재한다. 오토바이는 길에서 가장 낮은 존재이다. 특히 배달통을 뒤로 맨 스쿠터에게는 도로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가장 위협받는 존재이다. 자신의 차선을 잘 지키며 운전을 해도 차들은 경고도 없이 끼어들어 사고 날 뻔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오히려 유라시아 대륙횡단이 편했음ㅜ)     

하지만 나는 이러한 멸시와 시선에 크게 감정 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에 대해 생각을 곰곰이 해본다. 사람은 결국 사람이 필요한 존재. 사람인이라는 한자에서 둘이 기대는 것을 볼 수 있다.      


소위 딸배 라고 불리는 배달원의 업이 높은 성벽으로 둘러 쌓여있는 라푼젤 들에겐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기도 하다. 먹는 사는 것의 비루함이라는 것은 라푼젤들이나 바닥을 기어가는 나 같은 딸배들에게나 똑같기 때문이다.      


힘겹게 일을 마치고 집에서 샤워를 한 뒤 고양이를 끌어안으며 맥주 한 캔을 마시며 나의‘다르마’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다.      


“내가 세상을 위해 이롭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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