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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영 Jul 19. 2023

어느 새의 죽음

누워있는 남자 


내가 살고 있는 건물은 5층 건물이며, 1층은 편의점 2층은 bar 3층에서부터 5층은 가정집이다. 이러한 건물을 등기부등본상에는 근린생활시설이라고 한다. 


며칠 전 4층을 지나 집이 있는 5층으로 갈 때, 4층 현관 옆에 있는 창틀에 고개를 숙인 채 떨고 있는 참새를 발견하였다. 순간적인 마음으로 이 친구를 데려가 보살펴주고, 치료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젖어있는 참새의 모습은 마치 쥐처럼 보여서 만지기에 거부감이 들었으며 만약 이 친구를 데려갈 시 집에 있는 터줏대감 고양이 물루가 어떻게 할지 모습이 뻔히 보이기에 잠깐의 고민 끝 그냥 집으로 올라갔다. 


어제 잠깐 산책 겸 동네 마트에 물건을 사러 나갈 때 집 현관 앞에 있는 장우산을 가져갔고 건물 입구에서 나와 우산을 펼치는 순간 어떤 물체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보니 그때 그 새였다. 이미 부패가 진행된 새의 사체 때문에 새가 닿았던 우산의 면 부분엔 노랑과 형광의 중간 색의 진물이 묻어있었다. 


죽은 새를 바라보며 순간적으로 드는 의문이 어떻게 4층에 왔고, 기력 없던 새가 나의 우산 속으로 들어왔을까 하는 의문에서 시작돼 혹시 4층의 사람이 그 새를 내 우산 속으로 집어넣었을까? 아니면 택배 아저씨가 그런 행동을 했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이 가엾은 새가 마지막 힘을 발휘해 5층까지 올라와 검고 긴 장우산 속에 들어가 눈을 감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내 측은한 마음이 들어 새의 사체를 들어 다시 집으로 올라가 죽은 화단에 심었다. 나름 수목장인 샘이다.      


생각해보면 어릴 적에는 참 잔인했고 거칠었다. 집에 있는 금붕어가 든 어항에 사이다를 부어 죽였으며, 사마귀와 방아깨비 등 제법 큰 곤충을 잡아서 배를 갈았고 때때로 종이 위에 본드를 붙여 라이터로 태워 죽였다. 


하지만 이제 나이가 들면서 생명 자체를 못 죽인다. 심지어 비 오는 날 아주 가끔씩 출몰하는 바퀴벌레 등도 잘 잡지 못한다. 내가 고등 생물인 인간이라고 비교적 우리보다 몸집이 작으며 뇌가 작은 이런 작은 생명들을 함부로 죽이지 못하겠다. 내가 뭐라고. 비 등 하찮은 건 마찬가지고 우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라는 생명은 우주의 먼지조차도 못한다. 우주의 역사는 헤아릴 수 없으나 나의 생은 고작 100년도 채 되지 못할 것이다. 


최근 미디어에서 보고된 여러 가지 사건들 그리고 역사적으로 한때 바람을 이끌었던, 새간 사람들이 존경한 어떤 위대한 인물들과 그 당시 그를 따랐던 수많은 권력자들을 생각을 할 때도 덧없는 느낌이 굉장히 든다. 


계유정난을 일으켰던 수양대군 및 그를 따랐던 수많은 권력자들도 쿠데타 후 마치 세상이 제 것인 양 의기양양했지만 결국 수양대군은 빨리 죽었고 그 후 소위 공신이란 자들도 덧없이 사라졌으며 특히 한명회는 죽고 나서 연산군에 의해 부관참시 되었다. 


그 사람의, 그때 당시의 행위는 굉장하였지만, 결국 늙고 병들어 죽어가고 몇십 년만 지나면 그 살아있던 권력 자체도 결국 허무로 남는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삶에 대한 태도가 냉소와 허무로 점철됐다는 것은 아니다. 


지난 1월, 네팔 여행에서 마지막은 파슈파니트 화장터에서 종일 있었다. 10여 구의 시신을 태우는 것을 목격했다. 인간의 삶은 덧없고, 무한한 우주적 관점에서 봤을 때 가치가 없다. 결국 죽으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 화장 후 원숭이와 새들은 남은 재들을 먹어 치우느라 정신없었고, 남은 찌꺼기들은 강으로 보내졌다. 그럼 그 강 속에 있는 작은 물고기들과 미생물들이 먹어 치우고, 사람들은 그 물고기들을 다시 잡아먹을 것이다. 이렇게 순환된다. 아이들은 그 물에서 놀고, 누군가는 그 물을 바탕으로 목욕도 하고, 빨래도 한다.    


 


태초에 아트만이 있고 브라만이 있다. 
 아트만은 브라만이며, 브라만은 아트만이다.

     -우파니샤드-     


누군가 말한다. 사람은 죽어 혼과 백으로 나뉘는데, 혼은 우주로 가고 백은 그 자리에 남는다. 뉴턴의 아틀리에를 쓴 김상욱 교수는 사람은 죽지만 그 원자는 남는다고 했다. 그 원자는 지금 내가 쓰는 타자기에, 앉은 의자에, 팔을 대고 있는 책상 등 물질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에 스며든다고 한다. 또 죽음은 우주의 가장 자연스러운 부분이며, 현재까지 지구 말고는 '살아있다'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하며, 그래서 생명이라는 것을 가진 지구의 생물들은 가장 비자연적인 현상이라고 한다. 


이런 것을 보면 어째 불교 혹은 힌두교에서 말하는 가르침이나 과학에서 말하는 죽음에 관한 부분은 어느 정도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수천 년 전에 쓰였던 위의 경전들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옷을 입히면 양자역학과 동시성의 원리에 관한 것이다. 


결국 새의 죽음이나, 인간의 죽음이나 똑같다. 슬프다. 그리고 덧없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마음껏 사랑하는 삶을 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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