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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골 서노인 이야기(들풀의 어른동화 3)

"가장 무서운 것은 외로움이야."

by 들풀

우리 동네는 아직도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시골인데, 작은 오솔길을 지나면 물이 고인 “소(웅덩이)”가 있고 제법 널찍한 바위가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곳을 반석골(너른 바위가 있는 골짜기)이라고 부릅니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를 거쳐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 리는 초만원" 등 출산억제를 외쳤는데도 우리 동네(50호 정도)에는 제 또래가 열두명이나 있어서 그야말로 아이들이 넘쳐났습니다.

우리가 열살 즈음의 여느날 여름!

우리는 신나게 장난을 치며 놀다가, 오솔길을 달려서는 평평하고 너른 반석골 바위 위에다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서는 입술이 새파랗게 질리도록 멱을 감습니다. 물장구를 치기도 하다가, 종아와 오야가 힘을 합해 "수야"의 목을 감아서는 물 속에 집어넣습니다. 수야는 몇 모금의 물을 먹고 나서 율이에게 은근한 눈짓을 합니다. 율이가 물 밑으로 잠수해서 종아의 다리를 잡고, 수야가 종아의 목을 감싸쥐고 꺼꾸러뜨리는데 오야도 힘을 보탭니다. 종아가 드디어 항복을 하고, 우리들은 까르르 웃으며 마을로 내려옵니다.

반석은 보이지 않네..

그러던 날 중의 하루입니다. 그날 반석골에 모인 친구들은 숨바꼭질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반석골에는 초가 지붕을 머리에 인 작은 오두막 한 채가 있습니다. 마당에는 큰 감나무가. 있고, 코스모스와 개쑥부쟁이가 군락을 이루 피어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서노인 집'이라고 불렀는데, 서노인은 허리가 90도로 휘어진 상태로 걸었습니다. 또 앞이 보이지 않는지 더듬 더듬 나무지팡이를 휘두르며 다녀서, 아이들은 서노인을 보면 오금이 저려 달아나기에 바빴습니다.

숨박꼭질이 시작되고, 수야는 숨을 곳을 찾다가 급한 마음에 그 집의 삽짝문(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대문)을 열고 광으로 숨어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광에는 서노인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니는 뉘 집 아들이고?"

"예, 저는 암자골 기촌댁 막내 아들, 말수라 캅니더."

나는 기가 질려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 너거 어무이가 종종 반찬을 갖다 주어서 잘 묵고 있는데, 고맙다 캐라."

서노인은 광 안쪽에 있는 짚 광주리에서 감 홍시를 가져와서 건넵니다.

"아입니더. 아까 점심을 묵어서 배가 부릅니더."

"괴안타, 고마 한 번 묵어 봐라."

서노인은 말을 하면서도 손바닥에 침을 뱉으며, 부지런히 새끼를 꼬고 있습니다. 광의 안쪽에는 서노인이 만든 '덕석'과 '멍석', 지게와 지게에 얹는 '바자리', '싸리 소쿠리', 도리깨와 가래 등이 포개진 채 놓여 있습니다.

"요새 멍석이나 소쿠리 사는 사람이 있습니꺼?"

"가끔 찾는 사람도 있고, 심심해서 그냥 만들고 있다."

문득 서노인이 만든 물건은 그 솜씨가 섬세하고 튼튼해서 동네사람들이 만든 물건보다 훨씬 인기가 있고, 값도 비싸다는 아버지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새끼 꼬기를 마친 서노인은 짚을 물에 적셔놓고, 싸릿대는 물에 담갔다가 그늘에 말려두는 등 부산합니다. 그러다가 완성하지 못한 장방형의 멍석을 가져와서는 새끼 사이에 짚을 이어대다가, 짚이 마른 기미가 보이면 입으로 물을 '푸' '푸' 축이기도 하면서 멍석을 엮어 나갑니다.

사노인의 광

예전에 아버지가 덕석을 엮을 때는 항상 넓은 마당에서 삼촌들과 이웃 어른 두세 분이 이야기를 나누며 일을 하는 걸 보았으므로, 혼자서 모든 일을 해치우는 서노인이 여간 낯설고 신기하지가 않습니다. 어두컴컴한데도 너무 정확하고 재빨라서 나는 감을 먹던 입을 헤 벌리고 구경을 합니다.

"그런데 할배가 간첩이라는 말이 있던데, 참말입니꺼?"

"하하... 내가 고향이 북쪽인데, 6.25 동란 때 피난을 왔다꼬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제."

내가 할아버지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자, 할아버지는 옛 얘기를 들려줍니다. 할아버지는 황해도에서 살았는데, 국민학교를 다니다가 졸업을 못한 상태에서 한국전쟁이 났답니다. 어머니와 누나는 고향에 남고, 서노인은 아버지와 피난을 오다가 폭격을 맞아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묻어주지도 못하고 떠밀려 부산까지 내려왔다는 얘기를 하며 눈가를 적십니다.

그러다 어떻게 떠돌다가 우리 동네에 오게 되었고, 잔심부름과 머슴살이를 하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답니다. 서노인은 세경을 받은 돈을 차곡차곡 은행에 저축을 해서 꽤 많이 모았는데, 우연히 동냥을 온 젊은 여자를 보고 함께 살게 되었답니다. ‘그 때 그 여자에게 두 살배기 딸(희야라고 함)이 있었는데 참 예뻤다.’고 하며 벙긋 웃습니다.

그러다가 제방 쌓는 일을 하다가 굴러온 돌에 허리를 다치게 되어 병원에 입원했는데, 은행에 돈을 찾으라고 보낸 그 여자가 돈을 모두 찾아서는 도망을 가버려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 때가 할아버지의 인생에서는 제일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되뇌입니다.

가래와 도리깨(저의 큰형님 그림)

할아버지는 지게나 바자리, 멍석과 소쿠리 등을 엮어 장에 내다 팔아서 생활을 했는데, 10년 전 쯤에 눈이 아파서 병원에 갔답니다. 그런데 ‘녹내장이 많이 진행되어서 수술이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며 한숨을 쉽니다.

"니, 말수라 캤제? 세상에서 제일 무서분 기 무엇인 줄 아나? 외로움인기라. 요새 들어서는 희야 생각도 종종 나고, 고향생각도 나는 기라. 내 나이가 이제 일흔인데, 울매나 더 살지는 모르지만 더 아프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할아버지는 다시 "휴..." 한숨을 길게 토해 냅니다.

"할배! 언자 종종 놀러 오겠심더!"

나는 입바른 약속을 하며 서노인의 손을 꼭 쥐었습니다. 그날 그날 저녁, 수야는 서노인의 굽은 허리와 침침한 눈, 그리고 텅 빈 광 안 풍경이 오래도록 머리에 맴돌았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종아와 율이, 복아와 오야, 자야와 순이는 함께 용돈을 모두 모아 십리과자(잘 녹지 않아서 10리길을 먹을수 있다고 붙여진 사탕)를 5개나 샀습니다. 동무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걷는데, 시원한 바람이 오솔길을 따라 반석골까지 함께 불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할배, 언자는 우리하고 동무 할랍니꺼? 할배집을 우리 본부(아지트)로 정해서 종종 놀다 가도 되겠습니꺼?"

"하모. 내사 좋제!"

"할배! 우리가 십리과자를 사왔는데 예. 뽀사(부숴) 묵지 말고, 천천히 녹하서(녹여서) 드시이오."


자야의 말에 서노인이 입을 크게 벌리고 활짝 웃습니다. 서노인 집의 울타리에 참새떼가 짹짹 울며 날아오릅니다. 마당을 가득 채운 햇살이, 아이들 얼굴에 비춰서 반짝거립니다.

※ 예전에 적었던 글을 조금 수정했습니다.

(2025. 10. 마지막날, 들풀 )


#들풀의세상시는이야기 #들풀어른동화 #반석골서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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