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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솔불 놀이

불길 속을 뚫고 아버지는 나를 품안에 안았다

by 들풀

"수야, 막내야!"

아버지는 조용히 나를 흔들어 깨웁니다. 나는 눈을 부비며, 겨우 아버지를 바라봅니다.

"뒷산에 나무하러 가자!"

"혼자 가지, 뭐할라꼬 여섯살짜리 꼬맹이를 데려가누...."

어머니는 내게 옷을 겹겹히 입히며, 혀를 끌 찹니다.

"내 강새이, 추분데 수건은 꼭 두르고 댕기라이."

아버지는 바자리에 빈 가마니를 얹고는, 빈 지게를 짊어집니다. 새벽이 아직 깨어날 시간이 아닌지 주위가 깜깜합니다.

"어험, 어험"

아버지는 앞서 길을 잡으며, 바튼 헛기침을 합니다. 채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산새들이 후다닥 날아 오릅니다. 산길을 한시간여 올라 제법 편평한 해송밭에, 아버지는 빈지게를 부립니다.


"막내야, 너는 썩둥구리와 솔방울을 주워라."

주위에는 솔방울이 널려 있지만, 나는 무서워서 아버지의 뒤를 따릅니다. 한 자 길이의 나무등걸 앞에서, 아버지는 손에 침을 퉤 뱉어서 바르고는 도끼를 잡습니다. 그런 후 도끼를 번쩍 들어서 가속도를 붙여, 나무등걸을 내리칩니다.

지게와 바자리, 지게작대기(큰형님 그림)

"쩌엉"

산의 공기가 파르르 떨며 울리다가, 반대편 골짜기에 부딪혀서는 메아리가 되어 돌아옵니다.

"쩌어엉"

재잘대던 산새들의 소리가 멈추고, 메아리 소리만 온 산에 그득합니다.​

풀섶에 잠자던 꿩이 "꿔엉, 꿔엉"울며 날아가고, 다복솔에 구멍을 내어 잠자던 산토끼도 놀라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후다닥 달아납니다. 아버지는 다시 손바닥에 침을 바르고, 도끼를 공중으로 들어서는 냅다 나무등걸을 내리칩니다.

다시 나무등걸이 비명을 지르고, 메아리가 울립니다. 아버지는 득의만만한 웃음을 흘리며, 커다란 나무등걸을 쑥 뽑아 지게 근처로 던져 놓습니다. 지게 근처에는 크고 직은 나무등걸들이 모이고, 무서움증이 사라진 나는 토끼 발부리에 채여 넘어진, 작은 나무 등걸과 솔방울들을 부지런히 가마니에 담습니다.

아버지는 큰 소나무가 있었던 자리에 앉아 관솔을 톱으로 썰어 내다가, 도끼로 찍습니다.

"엄첨 단단해서 톱이 안 나간다. 이만하면 되었다. 이제 집에 가자!"

아버지는 지게를 지겟작대기로 받쳐 공구고는, 근처에 던져 놓았던 나무등걸들을 밑둥을 바깥으로 해서, 지게 바자리에 채곡 채곡 탑처럼 쌓아 올립니다. 내게는 솔방울과 썪은 나무등걸로 채운 가마니에, 칡 넝쿨로 멜빵을 만들어 줍니다.

아버지는 지겟작대기에 힘을 가하며, '끙' 신음을 뱉으며 일어 섭니다. 커다란 산만한 나무등걸 무더기가 아버지 머리 위에서 성큼성큼 움직이고, 나는 가마니를 어깨에 메고 촐래 촐래 아버지 뒤를 따릅니다.​

집에 와서 나는 밤이 되기를 애타게 기다립니다. 해가 뉘엿 뉘엿 질 때 쯤, 나는 종아와 오야, 율이와 복이를 불렀습니다.

"너거 이기 뭣인지 함 봐라!"

나는 적당한 크기로 자른 윤기가 나는 나무 뭉탱이를, 아이들 앞으로 무심한 듯 툭 던집니다.

"어~어, 관솔 아이가?

아이들은 부리나케 관솔들을 챙깁니다.

드디어 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관솔에 불을 붙여 손에 쥐고는, 빙글 빙글 돌리면서 동네를 휘젓고 달립니다. 종아는 개굴창에서 주운 낡은 깡통에 구멍을 내고 줄을 매어서, 더 크게 휘 휘 돌립니다. 도깨비불 같은 빨간 불빛들이 원을 그리며, 어두운 산골동네의 밤을 밝힙니다.

집으로 와서 나는 호롱불 대신 관솔불을 켰습니다. 검은 연기가 바람을 따라 춤을 추며 올라 가서는, 천장을 그을립니다. 나도 그 연기를 따라 춤을 추다가 너무 많이 논 탓인지, 눈이 스르르 감깁니다. 매캐한 기운에 눈을 떴는데, 관솔불이 넘어져 이불을 태우고 이제 내 옷에 옮겨붙고 있습니다. 나는 손으로 황급히 꺼 보지만, 손만 뜨겁습니다.

"아부지, 아부지!"​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아버지를 부릅니다. 그러다가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떴는데..

아버지의 품 안입니다. 아버지는 불 붙은 나를 품 속에 껴안고는, 불길 속을 빠져 나왔다고 합니다. 다행히 동네 이웃들의 도움으로, 작은 방만 태우고 불은 꺼졌습니다.

엄니는 아부지의 적삼을 벗겨서는 벌써 진물이 나는 상처를 솜으로 닦아 납니다. 그런 후 깊게 데인 어깨죽지와 팔뚝에 된장을 바르고, 무명옷을 찢어서 감았습니다. 나는 옷에 붙은 불을 끄려다가 데인 손바닥 상처가 좀 쓰라렸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자는 척만 했습니다.

(2023. 6. 들풀)

★ 어른동화가 사실인지 묻는 분이 계신데, 제가 지어낸 완전 허구입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1.관솔: 송진이 많이 엉긴 소나무의 옹이

2. 썩둥구리: 썩은 나무등걸의 방언. 등걸은 나무를 베어낸 밑둥입니다. 땔감으로 쓰기 위해, 오래된 등걸을 도끼로 내리치면 빠집니다.

3. 바자리: 발채의 방언. 지게에 얹어 짐을 싣는데 쓰는 소쿠리 모양의 물건.

4. 지겟작대기: 지게를 받쳐서 세우는 긴 막대기

#들풀의어른동화 #관솔불 #관솔 #아버지의사랑 #땔감 #나무등걸 #지게와바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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