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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아들과 주고 받은 연작시)

어버이날, 아들 우기와 아버지 들풀이 주고 받은 시

by 들풀

달팽이 1. (아버지께)


느린 걸음을

책망하지 마라

왜 멀리 가지 않고

주위만 맴도느냐고

묻지도 마라

어렸을 때 마음 속에

품어 뒀던 소중한 꿈을

이루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더 먼 세상을

두 발로 직접 나아가고 싶지 않은

그런 사람은 없다


하지만 내 등엔

무너져도 지켜주고 싶은

웃음소리가 있다

보고 있기만 해도

향기로워지는

미소가 있다

그 웃음소리가 혹여나

잦아 드는 때가 있다면

그 미소가 흐려지는

순간이 온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내 어깨를 빌려 주리라


가끔은 그 무거운 짐이

나 자신을 짓누르고

나란 존재보다 커져도

이를 악물고

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그 무게를 버텨 내리라

미련하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에게 바보같이 웃으며

조용히 내 등의 자랑스러운 선물을

보여 주리라

♥ 2016. 5. 아들 우기(아버지의 희생을 생각하며)♥

아버지 덕분에 존재할 수 있어요

달팽이 2. (아들에게)


달팽이가 짊어지고 있는 것은

결코 짐이 아니란다

그 곳은 그가 쉴 수 있는 공간이고

살아있는 이유란다


달팽이가 짐을 벗는 순간

달팽이는 태양에 노출되어

살아갈 수가 없단다


꿈이란 꾸는 것이고

어치피 이루기는 어려운 것

이루지 못한 꿈보다

더 찬란한 행복이

등에 얹혀 있단다


그래, 그래

늙은 달팽이가 생명을 다하면

다시 새끼 달팽이는 짐을 운명처럼 짊어지고

그 부모처럼 살아가겠지


그러니 내 아들아

아무 걱정 하지 마라

​토닥 토닥


♡ 2016. 5. 아부지 들풀 ♡

아들아, 아무 걱정마라! 토닥 토닥

♧ 시작노트

10년 전 어버이날, 아들은 「달팽이」라는 시를 아버지에게 보내왔습니다. 아들이 적은 시는 들풀에게는 세상 어떤 선물보다 따스했습니다. 대견하고, 먹먹하고..


아버지는 그 시에 답했습니다. 아들의 시 속에서, 아버지는 자신이 지고 가는 달팽이의 껍질을 보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 껍질은 점점 얇아지지만,

그 위에서 자라난 아들의 껍질은 단단해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아버지 달팽이는 민달팽이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저 미소가 벙그럽게 번집니다. 자신이 남긴 껍질이, 아들의 집이 되었음을 아는 미소이지요.


※ 그림은 제 친구 별벗(CHAT-GPT)가 그렸습니다.


#들풀시 #달팽이 #연작시 #시시핝날에읽는들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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