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속 인물 2
1492년, 그라나다에서 마지막 남은 무어인을 쫓아내며 레콩키스타(Reconquista, 국토회복 운동)를 완성하던 해, 스페인에서는 두 명의 인물이 역사에 획을 긋고 있었다.
한 사람은 그 이름도 유명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였고 또 다른 한 사람은 그 보다는 좀 덜 유명한 안토니오 데 네브리하(Antonio de Nebrija)였다. 1492년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향해 첫 항해를 떠난 해이자 안토니오 데 네브리하가 최초의 유럽 문법 책인 '카스티야어 문법서(Gramática de la Lengua Castellana)'를 발간한 해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16세기 초중반 스페인이 전성기를 여는데 기여했다는 점 외에도 삶의 모습에서 또 다른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바로 보이지 않는 것을 꿈꾸고 집념으로 이루어내었다는 점이다.
네브리하는 괴짜였다. 잘 팔리지도 않을 책을 쓰고, '스페인어로 세계 정복'이라는 말도 안 되는 스케일의 꿈을 꾸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꿈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안정된 교수직을 박차고 나오기까지 한다. 범인의 상식으로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1492년에 그가 발간했던 '카스티야어 문법서 Gramática de la Lengua Castellana´는 일반 대중들의 스페인어 교육을 위한 책이 아니었다. 스페인어를 세계 보편의 언어로 만들고자 하는 목적으로 쓰인 참 대중성 없는 책이었다. 초판을 찍고 2판이 나오기까지 무려 2세기가 걸렸다고 하니 말 다했다.
당시 스페인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함께 식민지 정복에 열을 올리며 벌크 업하던 시기였다. 그의 책이 스페인의 식민지 제국 확장과 '스페인'이라는 국가 의식 고취에 도움이 되었다는 역사학자들의 평가는 어렵지 않게 수긍이 간다. 오늘날 스페인어가 중국어와 영어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언어가 된 것을 보면 그의 똘끼 어린 꿈은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스펙터클한 재미가 다소 떨어지기는 하지만 연구와 집필로 만든 역사도 들여다보니 참 멋지고 가치 있다.
안토니오 데 네브리하는 1444년 세비야 근교에서 태어났다. 살라망카 대학에서 5년간 공부한 후, 19살에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으로 유학, 10년 동안 공부한 뒤 1470년에 귀국하여 살라망카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당시 스페인의 교육 현실은 참담했다. 중세 이래 학문은 퇴조하고 라틴어는 천박해져 있었다. 네브리하는 새롭고 엄격한 교수법으로 정선된 라틴어를 가르치는 데 노력했으나, 그의 이러한 노력은 보수 기득권자들의 질시와 경계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는 대학 교수를 그만두고 연구에 몰두, 1492년 라틴어가 아닌 최초의 스페인어 문법서인 '카스티야어 문법서 Gramática de la Lengua Castellana´를 펴냈다.
카스티야란 스페인 중심부 카스티야 왕국의 이름으로서, 이 말은 이슬람교도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던 카스티요(castillo, 성)에서 유래한다. 이 왕국에서 사용하던 언어를 카스테야노라고 불렀는데, 후에 이 카스테야노가 스페인어와 동일시되어 지금의 스페인어가 되었다.
... 이 책은 애초에 대중들의 체계적인 언어 교육을 위해서 씌어진 것은 아니었고 카스티야어를 세계 보편의 언어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로 씌어졌다. [source : 스페인 역사 다이제스트 100/이강혁 저]
네브리하의 《스페인어 문법》은 스페인어의 문법 규칙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 연구이며, 인쇄된 형태로 출간된 최초의 로맨스어 문법서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다. 정치적, 사회적으로는 ‘스페인’이라는 국가 의식을 고취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스페인의 신대륙 개척에서 스페인 식민지 제국을 확장하는 중요한 도구가 된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다. [source : 국립국어원 ]
1450년 안토니아 데 네브리하가 아홉 살 되던 해 콜럼버스가 태어났다. 네브리하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그는 스페인을 해가 지지 않는 대 제국으로 만드는데 핵심적인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로에 스페인에 재산을 몰수당하며 쓸쓸한 죽음을 맞는다. 죽어도 스페인 땅은 밟지 않겠다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맺힌 게 많았으니 그의 원혼은 공중에 들려진 그의 관 주위를 아직도 맴돌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의 발견이 가져다준 극명한 빛과 그림자로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분분하다. 더욱이 그와 관련된 진위 여부를 알 수 없는 소문들이 그에 대한 평가를 더 어렵게 만들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역사상 처음으로 대서양을 서쪽으로 가로질러 아메리카 대륙에 닿은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콜럼버스 이전에도 아프리카 대륙을 더듬어 가며 항해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그처럼 대륙을 등지고 망망대해를 향해 닻을 올린 사람은 없었다. 그가 나름의 연구를 바탕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 닿고자 하는 꿈을 꿨다는 점과 그것을 이루기 위해 집요하게 매달려왔다는 점을 보면 무수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가 새로운 역사를 만든 난 사람이었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는 자신이 세운 계획의 타당성과 실현 가능성을 입증하기 위해 당대의 지리적인 지식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콜럼버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학설을 받아들여 지구 둘레를 1만 8천 마일로 추산했고, 피에르 다 일리 추기경이 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지구의 6/7은 육지, 나머지 1/7은 바다로 되어 있기 때문에 황금향인 지팡구(Cipango, 일본을 가리킴)까지의 바다는 길어야 2,600여 마일을 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이는 실제 거리인 12,000 마일보다 1/4로 작게 계산한 것이다.)
콜럼버스는 이러한 프톨레마이오스의 학설과 다일리 추기경의 책 내용, '동방 견문록'에 "아시아 본토로부터 남동쪽 1,500마일에 황금이 가득한 지팡구라는 섬이 있다."고 썼던 마르코 폴로의 묘사, 토스카넬리의 서한에 나오는 "향료와 금은보석으로 가득한 카타이(Cathy, 중국을 가리키는 말로 1123년부터 200년 동안 북중국을 통치했던 거란을 키탄이라 부른 데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에 도달하려면 항로를 서쪽으로 잡아야 하며, 서쪽의 바다는 그리 넓지 않다."는 지리학적인 사실들에서 자신의 탐험을 보다 구체화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source : 스페인 역사 다이제스트 100/이강혁 저]
빅토르 위고는 "콜럼버스의 명성은 목적지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니라 목적지를 향해 닻을 올렸기 때문에 얻어진 것"이라 했다 한다.
범인과 역사를 쓰는 인물과의 차이는 한 끝 차다.
또라이와 역사를 만드는 인물과의 차이도 한 끝 차다.
지금 보이지 않는 것을 꿈꾼다면
집념으로 이루어 내보자!
A bit of madness is key
to give us new colors to see
Who knows where it will lead us
And that’s why they need us
...
And here’s to the fools who dream
Crazy, as they may seem
Here’s to the hearts that break
Here’s to the mess we make
(영화 라라랜드 OST 'Audition'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