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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상 Oct 06. 2024

#7.기억리셋

#파노라마 #소설 #기억리셋 #잔상

[출가장소]

대장과 그의 부하가 도착한 곳은 어느 한적한 읍내 도로였다. 왕복 4차선의 도로였고, 양갈래에는 높아봤자 3층가량의 오래된 시멘트 건물들이 듬성듬성 놓여있었다. 그들이 서있던 곳으로부터 50m 떨어진 곳에 횡단보도가 있었고 그 앞에 저승사자들이 이미 와서 검은 바리케이드를 세워 출입을 막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수많은 헌터들이 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자자 그만들 구경하고 그만들 가시게나. 이건 저승사자들의 영역이야."

어디선가 다부진 체격에 한 남자가 나타나 소리치며 말하였다. 그의 몸에 딱 들어맞는 검은 정장만 보더라도 평상시에 그가 얼마나 운동을 많이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의 주변에서 저승사자 몇 명이 고개를 낮춰 그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는 것만 보더라도 결코 낮은 직위를 가진 자는 아니리라.


"흠.. 김도운이 왔군"

대장은 단번에 그를 보자마자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강력사건만 맡는다는 그 김도운 차사요?"

부하는 대장에게 물었다. 대장은 답 없이 목만 조용히 끄덕였다.

"허나 김도운 차사는 1900년대 사건을 맡지 않습니까? 그런데 2000년대인 사건에..."

"흠... 그러니까 말이야."

"어라? 저쪽에는 방도현 차사도 왔습니다."

부하가 손 끝으로 가리키는 차도 건너편에 어느 남자가 보였다. 170cm 정도에 배가 볼록히 튀어나오고 원형 탈모가 온 듯 정수리 부근이 하얗게 보이는 통통한 남성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방도현 차사는 2100년대 사건담당인데... 흠.. 이건 정말 단순한 사고가 아닌 게 맞긴 한가 보군"

대장은 한 손으로 턱에 남아있던 짧은 수염을 만지작 거리며 흥미롭다는 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본시 강력사건에 대한 저승사자의 시간대 영역은 100년 단위로 맡는데 1900년대부터 2100년대까지 맡은 저승사자들이 현장에 나왔다는 것은 소문의 진상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천국에서의 탈출이라.'

대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돌려 바리케이드 안 쪽에서 거구의 남자와 긴밀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유일한 여성 저승차사를 바라보았다. 2000년대 사건 담당자인 이영희 차사였다. 곱게 빗은 머리카락 꼿꼿이 편 허리를 보며 한결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김차사님 오셨습니까?"

바리케이드 안쪽에서 짧은 스포츠머리의 남자가 나오며 조금 전에 현장에 당도한 김도운 차사에게 인사하였다. 이영희 차사의 막내였다.

"대체 무슨 사건이길래 나한테까지 호출이 온 거지. 사건 시각이 정확히 어떻게 돼?"

김차사는 그의 인사에는 대꾸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네 진시.. 악"

김차사는 안경 낀 남자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사건발생 시각이 조선시대야? 정신 안 차려?"

"죄, 죄송합니다. 이천오십삼 년 오전 일곱 시 십 분경으로 추정됩니다."

안경 낀 남자는 정강이가 얼얼한 듯 오른손으로 살며시 문질렀다.

"구슬 활성화 장소는?"

"네! 저 횡단보도입니다."

김차사는 계단 가까이로 갔다. 살며시 검게 그을린 재가 보였다. 이론적이긴 하지만 구슬활성화가 되면 비행기가 착륙할 때처럼 바퀴자국이 남게 된다. 구슬은 다른 세상에서 또 다른 세상으로 이동할 때 이동하는 비행기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아침 됫바람부터 이리도 호들갑인지 모르겠어." 어느새 현장 안으로 돌아온 방차사였다.

"그러게 말이유. 형님. 안 그래도 지금 밀려있는 사건들로만으로도 충분히 골치가 아픈데 말이요."

김차사는 바퀴자국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을 하였다.

"오셨습니까? 방차사님, 김차사님"

이영희 차사였다.

"고생이 많지? 허허 이거 아주 골치가 아프겠어"

방차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하였다. 큼직한 입가의 검은 수염들이 같이 움직였다.

김차사는 여전히 눈을 떼지 않은 채 손만 번쩍 들어 인사하였다.

"목격한 저승차사나 혼들은 없대?"

김차사는 손을 내리며 말하였다.

"당시 해당 시간대에는 혼들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어요. 하지만..."

이영희 사는 횡단보도 건너편에 있는 빨간 벽돌로 지어진 빌라 건물 윗 쪽을 가리키며  잠시 말을 끊었다.


"일단 저기 지박령이 뭔가를 본 거 같아 차사들을 보냈습니다."

"역시 눈썰미가 좋네. 혼의 기운을 꽁꽁 감춰서 나도 정확히 어딘지는 몰랐는데.. 허허"

방차사는 또다시 큼직한 입을 벌려 웃었다.

"흐음.. 나도 가봐야겠어. 이 정도로 기운을 감출 정도면 보통이 아닌 거 놈들인 거 같아!""

김차사가 마침내 일어나며 말하였다.

"아니에요. 제가 가보려고요. 중간 탐문조사도 할 겸. 김차사님은 방차사님과 함께 현장 감식이 마칠 때까지만 지휘를 맡아주세요!"

"뭐 이 사건 리더는 자네니깐 좋을 대로"

사는 알았다는 듯 손바닥을 들었다 내렸다. 이차 사는 가벼운 목례를 하고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허허 역시 이차사야. 순식간에 우리를 현장에 묶어놓네. 그건 그렇고 아까 봤어. 이차사 예전 남편도 온 거 같던데."

"어차피 이승에서의 일이고 관심 없어요. 어서 일이나 합시다. 형님"

김차사는 큼직한 손을 들어 방차사의 어깨를 주무르며 감식반쪽으로 향하였다.

"어허 아프다니깐."

방차사는 아프다는 듯 호소했지만 싫지는 않은 듯 뿌리치지는 않았다.


[야산입구]

어느덧  야산을 내려온 훈과 소연은 집으로 향하였다. 그 둘은 한동안말 없이 걸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훈의 손을 가만히 잡고 소연은 나란히 걸었다. 10여분 정도 걸었을까?  어느새 커다란 횡단보도를 두고 그들은 신호등 아래에 섰다.

길건너에는 아파트 입구가 보였고 옆에는 상가건물이 보였다. 8층정도에 제법 널따란 면적을 갖고 있어 수십 개의 간판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뿜어내고 있었지만 "장수국수"라는 간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훈의 머릿속이 다시 번갯불이 켜지듯 기억이 들어왔다. 이번 기억은 그 식당 주인들에 대한 기억이었다.


30년 전통이 있다고 나름 자부심을 갖고 일하는 주인이었다. 60은 족히 넘어 보이는 여자주인이었는데 굵은 파마머리에 야무져 보이는 눈매는 넉살 좋아 보이는 미소와 교묘히 어우러졌다. 남편은 몇 해 전 공무원에서 정년 퇴임을 하고 식당일을 거들고 있었다. 자기 관리가 확실한 듯 염색관리를 통해 머리카락은 흰머리 하나 없이 새까맸다. 그 역시 잘 웃는 편이라 그의 눈만 마주쳐도 나 스스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저부부는 싸울 일도 없겠지만 싸우게 되더라도 웃으면서 싸울 게야!" 그 가게를 지나갈 때마다 훈은 소연에게 입버릇처럼 말하였다.

비단 저 집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의 성격뿐이 아니었다. 맛도 있었다. 얼마나 우렸는지 모르지만 멸치 육수가 구수하고 삼삼하니 평상시 싱겁게 먹는 소연이나 훈이 참 좋아할 만도 했다.


'꼴깍' 어느새 훈이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들킬세라 훈은 헛기침을 하고 곁눈질로 소연을 보았다. 순간 소연과 눈이 마주치며 움찔하였다. "호호 당신도 참 주책이유. 그냥 국수 먹고 들어갈까요?" 소연은 재밌다는 듯 웃으며 말하였다.

"아.. 아냐 무슨. 신호등 바뀌었네. 어서 건넙시다."

훈은 소연의 손을 당기며 앞장서 걸었다.

어느새 아파트 입구에 들어선 그는 황급히 복도를 지나 문 앞에 섰다. 급한 듯 비밀번호를 눌렀지만 떨리는 손가락이 자꾸 엉뚱한 버턴을 눌렀다.

"내가 할까요?"

소연은 훈 등에 손을 얹어 조심히 물었다. 그때 '띠리릭'하고 문이 열렸다. 문을 닫고 들어선 순간 익숙해야 할 집의 공간이 순식간에 바뀌며 식당 테이블들이 눈에 들어왔다.


"형님 형수님 오셨어요? 아침부터 부지런들 하시네."

국숫집 주인 명환이었다. 그는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듯 충혈된 눈으로 멍하니 테이블에 앉아 TV를 보다 그들을 맞이하였다.

"이.. 이럴 리가 없는.."

훈은 당황한 나머지 말끝을 흐린 채 닫고 들어온 문을 다시 둘러보았다. 문밖은 어느새 복도가 아닌 길 건너에서 바라보았던 국숫집 입구였다. 그는 소연의 손을 잡은 채 다시 문 밖으로 나갔다.

"여보 아니 대체..."

소연은 당황스러운 듯 그를 쳐다보며 말하였다.

"가만.. 이게 대체 무슨.."

혼란 속에 훈은 이내 정신을 차려 소연을 잡아끌어 다시 집으로 향하였다. 이번엔 좀 더 빠른 걸음으로 갔다.


"5층입니다."

어느새 엘리베이터가 그가 사는 층에 멈췄다. 하나 이번에는 엘리베이터 문을 나가는 순간 또다시 조금 전에 보았던 식탁 테이블들과 TV를 멍하니 보던 명환이 보였다.

"형님 형수님 오셨어요? 아침부터 부지런들 하시네."

명환은 좀 전과 같은 말을 반복하였다. 마치 그날 처음 보는 것처럼.

훈은 또다시 뒤돌아 보았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문 밖은 엘리베이터가 아닌 입구로 바뀌어 있었다.

그 옆에 있던 소연을 쳐다보며 훈은 말하였다.

"임자도 보지 않았소??  분명 우리가 집에 갔는데.."

"그게 무슨 말이우? 오늘 아침부터 왜 이러는지.."

소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의 손을 잡아끌어 자리에 앉혔다. 훈은 망연자실한 듯 털썩 자리에 앉았다.


얼마뒤, 그들 앞으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수 두 그릇이 앞에 놓였다. 새하얀 면 위로 투박하게 던져진 김가루들이 뜨거운 열기에 조금씩 녹을 듯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소연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훈을 바라보았다. 훈은 괜찮다는 듯이 손을 저어 어서 먹으라고 손 짓하였다. 그녀는 굳게 입을 다물며 그를 잠시 바라보다 간단한 기도를 마치고 젓가락을 들었다.  

'이를 어쩌지. 말을 해줘야 하나.'

하지만 이윽고 훈은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학수의 경고가 바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고개를 흔든 채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것을 기억리셋이라고 하는 거야."

어느새 또다시 옆테이블에 앉아있는 학수를 발견하였다. 훈은 놀란 듯 그를 쳐다보다 보았다.

"기억.. 뭐?"

"기억이 다시 원자리로 찾아가는 과정이야. 실제 벌어졌던 일이 아닌 왜곡된 기억이라."

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맞은편으로 앉아 학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자네 내 친구 아닌가? 나 좀 도와주게. 그녀를 살려줘."

"어허. 벌써 잊었는가? 이건 이미 벌어진 일이라고. 그것을 어떻게 막아?"

학수는 답답한 듯 뿔테를 고쳐 쓴 후, 다소 차가운 표정으로 훈을 바라보았다.

"왜 하필 이 기억인가?"

무심코 내뱉은 말이었지만 훈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억의 구슬을 선정하는 건 지금 이 순간의 자네가 아니라 평생의 자신이 선택한 것 일세. 그러니 너무 억울해하거나 뭔가를 바꾸려고 하지 말게."

훈은 체념한 듯 자리에 털썩 앉았다.


"자자. 너무 나쁜 것만 생각지는 말자고. 이 기억도 분명 평생의 자네가 선택한 이유가 있을 게야."

학수는 가볍게 훈의 손 등을 토닥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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