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가자고.. 임자. 허억허억"
훈은 소연의 손을 붙잡고 재촉하였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유. 천천히 좀 가요. 숨이 차. 하아하아"
소연은 힘겹게 이끌리며 답하였다. 벌써 몇 번째였는지 모르겠다. 훈은 국숫집에서부터 몇 번이고 소연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하였지만 그때마다 모든 것은 반복되며 그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원래 발생했던 기억의 시간대로 가고 있었다. 좀 전에 국숫집에 서 있었다면 다시 리셋이 되면서 국숫집에 앉아있게 되고 또다시 도망가다 리셋이 되면 국수가 나오는 식으로 기억의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새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소연의 외출조차 막지 못하고 따라나서 그녀를 붙잡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기억의 시간은 묵묵히 흐르기만 할 뿐이었다. 밀리고 밀리는 파도처럼.
"허억허억"
훈은 거친 숨을 내쉬며 땀에 흠뻑 젖어 계속해서 소연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하였다. 그때 소연이 붙잡고 있던 손을 뿌리치며 아파트 길 가에 있던 벤치에 앉았다.
"도.. 도저히 힘들어서 못 가겠어요. 좀 쉬었다가 가요." 소연 역시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 훈에게 손짓하였다.
"아.. 아니 지금 여기서 이럴 때가.."
훈은 말을 멈췄다. 소연이 너무 지쳐 보였기 때문이다. 시계를 보았다. 그 사고가 일어난 시간까지 대략 20분 정도 남았다. 아무리 발버둥을 쳤지만 소용이 없음을 자신도 무의식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 역시 소연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휴 땀 좀 봐요" 소연은 주머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어 훈의 콧등과 입가를 톡톡 두드려 땀을 닦아주었다. 그 순간 또다시 번갯불처럼 머리 한편이 번쩍였다.
소연은 늘 자신보다 훈이 먼저였다. 간식을 먹을 때도 훈에게 먼저 주었고 지금처럼 땀을 흘렸을 때도 훈의 땀을 먼저 닦아주었다. 그런 그녀의 기억들이 채워지자 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땀을 닦아주던 그녀가 눈이 휘둥그레지며 물었다.
"아니 여보 갑자기 눈물을.."
"아무것도 아니야. 난 됐으니 임자 땀이나 닦아. 흠흠"
훈은 메여 오는 목을 가다듬고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소연은 뭔가 말을 하려 했으나 그녀의 장점처럼 입을 다문채 말하지 않았다. 대신 하늘을 올려다보며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어휴 하늘 좀 봐요. 어쩜 저리 맑을까?"
경이로운 듯 하늘을 보는 소연을 힐끗 보고 훈도 같이 올려다보았다. 그녀 말대로 하늘은 맑았다. 구름 한 점 없어 마치 흠없이 깨끗한 푸른 도화지가 펼쳐져 있는 것만 같았다.
"그날도 그랬죠?"
"언제 말인가? 하늘 맑은 게 어디 하루이틀 일인가?"
"아니 우리 연희 가지려고 할 때 말이유. 애가 하도 안 들어서 경주까지 내려가지 않았소"
훈이 살짝 손가락으로 그녀의 허벅지에 갖다 대니 기억이 번쩍이며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가 언제 적인데.. 어휴 임자는 기억력도 좋아"
그러나 어느새 훈도 조금 전 들어온 기억에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출렁이며 그날의 기억이 눈앞에 그려졌다.
훈과 소연은 혼인한 지 몇 해가 흘렀는데도 아이가 들어서질 않았다. 날짜도 맞춰보고 시험관으로 배가 시퍼렇게 멍이 들 때까지 주사를 맞고 그 아픔에 훈과 소연은 한껏 오열을 한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이제 그만할까?"
"올해까지만 해보고."
한차례 눈물을 쏟아낸 뒤 훈은 소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하여 보았지만 그렇게 멈추는 것을 한 해 한 해 미뤄왔던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주 어느 마을에 진맥 한번 보고 약 한번 먹으면 애가 들어선다는 용하다는 한약방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처음에는 훈과 소연은 콧방귀도 안 뀌고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그들은 좋다는 약들은 있는 대로 먹어 보기도 하였고 시험관 성공률이 높다는 병원들도 수차례 옮겨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번 만은 다르지 않을까?" 하고 또 한 번 속는 셈 치고 경주에 내려가보기로 한 결심이 들어선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실 그간 차일피일 포기를 미뤄왔던 그들에게 작년에 결단을 서게 한 일이 생긴 것이었다. 그렇게 눈물과 피멍이 새겨진 그들에게 마침내 애가 들어섰는데 그만 8주가 된 무렵 '쿵쾅' 거리던 아기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과 지난주만 해도 아기 심장소리도 크게 들렸고 그 속도가 너무 빠르지 않나 싶어 몇 번이고 병원에도 물어보고 인터넷에서 검색하였는데. 갑자기 기별도 없이 '뚝' 심장이 끊겼다니 처음엔 너무 어이가 없어 화를 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어떤 감정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펑펑'눈물을 쏟아내는 아내를 몇 시간 만에 겨우 달래고 밥을 먹는데 그제야 훈도 그 슬픔에 눈물을 쏟아낸 것이었다.
"오빠 이제 그만할까?"
늘 훈이 먼저 꺼내던 말을 이번에는 소연이 먼저 꺼내었다.
"올 해까지만 하고 이제 그만하자"
어쩌면 포기가 두려웠는지 모르겠다. 훈은 생각지도 못 한 그녀의 물음에 그녀가 이전에 답하던 답을 해버렸다.
그러하니 그들로서는 알면서도 속아보는. 아니 어쩌면 마지막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짐을 싸매고 경주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고속도로를 달리며 바라보았던 하늘을 소연은 기억한 것이었다. 아침에는 솜털 같은 비가 내리면서 잔뜩 먹구름이 껴있었는데 어느새 내려가면서 하늘이 게이더니 새파란 하늘 위로 눈부신 햇살이 엎질러진 듯 반짝거렸다.
"역시 기도의 힘이야"
아내는 방긋 웃으며 말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경주를 다녀오고 아기를 갖게 되었다.
"임자. 키우는 것도 고생이었지만 희은이 갖느라 너무 고생했어"
훈은 그의 손을 소연 위에 살며시 얹었다.
"당신도요." 소연은 훈을 바라보며 웃으며 답하였다.
"다음생에 우리 또 보지. 우리 희은이도"
"그 고생을 또 하더라도요?"
소연은 장난기 섞인 듯 실눈으로 훈을 흘겨보면서 얘기하였다.
"암. 그렇고말고.. 내가 정말 다..."
그 순간 땅이 흔들거리기 시작하였다. 훈의 심장이 쿵쾅 거리며 소연의 손을 꽉 잡고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소연은 땅이 흔들거리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지 평온한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들이 몸이 공중에 떠오르기 시작하였고, 그들이 앉아있던 의자도 땅에서 뽑혀 나왔다. 훈은 그녀의 손을 놓지 않으려고 꽉 움켜잡았다.
어느새 도로 한 복판에 그들이 놓였고, 검은색 승용차가 50여 미터 앞에서 조금씩 비틀거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훈은 그녀를 보호하고자 와락 끌어안았다. 차량이 그들에게 다가서자 훈의 몸을 관통하고 품에 안겨있던 소연만이 몇 미터를 나동그라졌다.
"여... 여보.."
훈은 길바닥에 누워있는 그녀를 향하여 달려갔다. 피를 흘린 채 의식을 잃은 그녀를 부둥켜안고 훈은 그녀를 몇 번이고 부르며 오열을 하였다. 그녀의 감긴 눈이 다시 떠지길 바랐지만 이미 소용이 없는 듯하였다.
"흐으윽.. 고.. 고생만 시키고 내가 임자한테 너무 미안하네... 흐윽"
어느새 주변이 어두워지고, 품에 안겨있던 그녀마저 희미해져 가며 사라졌다.
"이미 일어난 일일세."
한참을 그 자리에 주저앉아있던 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학수의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다.
"자네가 말하지 않았는가? 천국에 가져가고 싶은 기억들만 가져간다고. 이 기억은 좋은 게 아니지 않은가?"
"허허. 자네의 기억인데 내가 그것을 어찌 알겠는가?"
학수는 또다시 중지로 그의 뿔테를 고쳐 쓰며 훈에게 말하였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소연이 떠난 자리에 구슬이 없었다. 훈은 눈물로 뿌예진 눈을 비비고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구슬을 찾을 수 없었다.
대신 주변이 다시 환해지더니 검은 정장의 50대로 보이는 한 여성이 나타나며 훈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울고 불며 사정하기 시작하였다.
"정.. 정말 죄송합니다. 한 번만 합의를..."
"사람 죽여놓고, 합의라니. 어디서 뻔뻔하게."
어느새 옆에 또 다른 여성이 나타나 그녀를 떼어내며 울면서 소리쳤다. 딸 희은이었다. 훈 역시 그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분노와 슬픔이 뒤섞이며 사정을 하고 있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희은에게 밀려 바닥에 엉덩이를 철퍼덕하고 나동그라졌다. 옆에 교복을 입고 있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딸아이가 가만히 서서 울고 있다가 넘어진 그녀에게 다가가 부축하고자 다가갔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자세를 고쳐 무릎을 꿇고 손바닥을 빌며 다시 말하였다.
"정말 입이 몇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합의가 안되면 애아빠가 감옥에 가게 돼요. 제발 그것만은..."
"그러면 우리 엄마는 어떡할 건데?? 뚫린 주둥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야!"
분노에 찬 희은이 소리쳤다.
훈 역시 빌고 있던 그녀가 괘씸하다고 생각하였다. 한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을 그녀의 남편 때문에 그 자리에서 잃고 말았는데 그를 용서해 달라고 비는 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솔직히 이해를 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돌아서서 그 자리를 떠나려는 순간, 훈의 머릿속에서 벤치에 앉아 하늘을 보며 웃던 소연의 모습이 떠올랐다. 환한 웃음, 희은이를 갖고자 경주까지 내려가던 그 화창한 그날이 또다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그녀가 훈을 쳐다보며 입으로 뭔가 뻥긋 거리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 훈은 좀 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제야 그녀가 훈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였다. 훈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흠칫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이렇게 애 아빠가 감옥에 가버리면 우리 아이랑 저는 정말..."
"아니 이 여편네가 말이 안 통하네. 사람을 죽여놓고 뻔뻔스럽게 할 소리야?"
"조용.."
"어떻게.. 그렇게..."
"모두 조용하라니깐!"
훈의 고함에 일순간 모두가 고요해졌다.
"아.. 아빠!" 희은이 훈을 보았다.
훈은 그런 희은의 눈 길에도 아랑 곳 하지 않고, 걸어가 무릎을 꿇고 있던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몸을 숙여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음... 흐음.."
뭔가를 말하려 하였지만 입이 선뜻 떼어지질 않았다.
"그.. 그러니깐.. 내.. 내.. 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면.."
훈은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질 않았다. 하지만 끝까지 말을 해야만 했다.
"다.. 당신을 용서합니다..."
어렵게 말을 뗀 훈은 또다시 오열하기 시작하였다. 어느새 따뜻한 손길이 훈의 어깨를 어루만져주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소연이 잘했다는 듯이 따뜻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 난 용.. 서할 수가 없었어. 미안해.. 임자라면 용서했을 텐데.. 미안하네..."
그렇게 훈은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어느새 사라진 그들 사이에 반짝이며 조금은 진한 회색 빛이 감도는 구슬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번 기억은 용서였구먼. 역시 자네다워. 그들을 용서하지 못한 게 후회가 되었던 게야."
학수는 울고 있는 훈의 어깨에 손을 토닥이며 말하였다.
"잘했네. 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