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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상 Sep 30. 2024

#6.두 번째 기억

#파노라마 #소설 #기억 #진상

까맣게 사라져 버린 그 자리에 시커먼 구슬이 남아있었다. 검은 턱수염의 커다란 남자는 좀 전의 가벼운 모습과 달리 그 자리에서 가벼운 묵념을 하였다.

“대장!!”

그때 시커먼 피부와 얼굴에는 오른쪽 눈썹 위 이마에서부터 볼까지 타고 내려온 굵직한 칼자국이 나있는 험상궂은 남자가 황급히 달려왔다. 키는 180cm 정도 돼 보이는 남자는 다소 근육질 몸매를 가진 듯 딱 달라붙은 검은 티셔츠로 덮은 가슴팍이 움직일 때마다 들썩들썩거렸다.

“쉿”

대장이라 불린 검은 턱수염의 남자는 왼 손 검지를 자신의 입가에 조용히 갖다 대었다. 그의 손 짓 하나에 달려왔던 남자는 잠시 움찔거렸다. 그의 짧은 묵념이 끝나고 남자에게 시선을 주자 그가 말하기 시작하였다.  


“방금 저승사자를 통해 들었는데 최근 출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대장은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캡모자를 머리 위로 덮어썼다.

“그게 사실이야?”

“네, 분명합니다. 그 입방정 떠는 진욱 차사가 전해주었습니다. 평상시 노자돈을 두둑이 가져가는 놈이긴 하지만 그래도 빈 말은 하는 놈은 아니라서요!”

칼자 남자는 칭찬을 기다리는 듯 멋쩍게 웃었다.

대장은 너무 놀라면서도 기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게 얼마나 기다려왔던 일인가? 그가 서있던 남자에게 다가가니 덩치가 무색해질 정도로 상당히 큰 키와 풍채를 뿜어냈다.

“그런데 어떻게 찾아야 할까요? 게다 저승사자들은 우리를 추적하려고 할 텐데”

“흠..."

대장은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기었다.


그의 부하가 말한 대로 저승사자들이 문제였다. 실제 헌터라는 것도 신고제이다. 죽고 나서도 골치 아프거나 사악한 영들은 저승사자들을 대행하는 사설 같은 역할을 맡은 것이다. 반드시 허용된 수배 영혼들에 한해 사냥이 가능했다. 앞서 말한 진욱 차사가 우리를 관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자돈을 밝히는 놈이라 어느 정도 돈만 쥐어주면 조금 더 범위가 벗어난 영혼들을 사냥하게 눈감아주었다. 이를테면 앞서 잡은 정두영이다. 이 천하의 몹쓸 살인마는 공식 수배자로 저승사자만이 잡을 수 있다. 생전의 그 죄가 무거워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헌터에게 잡히면 심판대 가기도 전에 영혼이 아예 사라진다. 아무리 무시무시한 지옥에 간다 하더라도 형기가 있다. 이를 마치면 영혼이 정결하게 되었는지 환생이라는 재시험을 치르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 즉 헌터가 왜 존재하느냐? 대부분의 인간들은 죽으면 환생할 수 없다. 각자의 심판을 받고 끝에는 그들의 기억이라는 구슬을 갖고 하늘나라로 가게 되는데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대부분 죽으면 이승에 대한 욕구가 강렬하다. 그래서 우리 같은 헌터는 심판을 받아야 하는 영들의 기억의 구슬을 빼앗아 대신 죗값을 치르고 환생을 꿈꾼다. 반대로 구슬을 모두 빼앗긴 영은 소멸하게 되어 존재하지 않게 된다. 하나 빼앗은 구슬은 자신의 것이 아니기에 일백 개를 모아야 한다.


다시 이야기의 앞단으로 돌아가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면 분명 다시 나올 수가 없다 하였다. 그런데 단 한 명 나온 사람이 있었다. 예수라고 불리는 자다. 어떠한 연유인지 모르겠으나 다시 하늘나라로 돌아갔던 것으로 보아 굉장히 빽이 있는 자임은 확실하다. 중요한 건 하늘나라에서 나온 구슬은 정결한 결정체라 5개만 있어도 환생이 가능하다고 전해진다. 모두들 그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설이 하나 있다. 천국에서 나온 구술은 이미 정결하여 그 구슬을 갖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하지는 않다.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이었고 여태껏 단 한 번도 일어난 일이 아니었으니깐.


"일단 출가한 장소로 가서 흔적을 찾는다. 어차피 우리가 관심이 클 것이라는 것도 알 테고. 다른 헌터들도 이미 와있을 테니."

대장은 고민 끝에 이야기하였다. 그의 말대로 출가한 경우가 생소한 일이기에 분명 많은 이들이 와서 보고 있을 테고 그 사이에 섞이는 게 더 낫다.

"역시 대장입니다. 하하" 칼자국의 남자는 호탕하게 웃었다.

"앞장서라. 바로 출발하자!"

"네!"



[77세 그날]

"하아"

깊은 호흡과 함께 훈은 찬물을 얼굴에 끼얹은 채 거울을 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장학수와 아무런 배경도 없는 눈부신 곳에서 걷고 있었다.

"자. 다음 기억으로 떠나야 할 차례일세. 준비되었는가?"

"아 떠나기 전에."

학수는  노인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그러자 또다시 머릿속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그래. 자네 이름은 훈일세. 훈."

'훈..?'

노인은 자신의 이름이 익숙하면서도 어색하여 되네였다.

습관처럼 검은 뿔테를 고쳐 쓴 학수는 훈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러더니 살며시 훈의 등을 떠밀었고 순식간에 장면이 바뀌며 거울 앞에 마주한 것이다.


훈은 거울 앞의 자기 모습을 바라보며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분명 자기 자신이었지만 낯설게 느껴졌다. 나이 든 노인임에는 틀리 없으나 좀 전과는 달리 그의 허리에 힘이 들어가 똑바로 설 수 있었다.

'이, 이게 나의 모습이었나?'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그  자신에 자기도 모르게 살짝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다시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거울 속의 노인은 이제 막 잠에 깬 듯 머리가 이리저리 뻗쳐있었고 좀 전에 끼얹은 물이 얼굴에 남아 그의 이마의 주름 사이사에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똑똑"

그때 문 밖으로 노크소리가 들리며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수?"

소연의 목소리였다. 조금  전까지 병실에서 들었던 목소리 그대로였다. 그는 문을 벌컥 열었다.

"아이고 깜짝이야!"


그의 눈앞에 소연이 서 있었다. 병실에서 바라본 모습 그대로였다. 정갈하게 빗어 넘긴 검은 머리카락, 볼록한 이마. 그리고 반짝이는 눈망울까지.

훈은 소연을 와락 끌어안았다.

"아니 이게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일이. 물도 안 닦고 왜 이래요. 차가워"

소연은 그의 물기가 묻은 얼굴에 차갑다고 불평하였지만 그의 등을 살며시 두들겨 주었다.

"지, 진짜 임자 맞는가?"

훈은 믿기지 않는 듯 몇 번이고 그녀가 맞냐고 물어보며 안았다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가 하기를 반복하였다. 어느새 뜨거워진 그의 눈시울에 이제는 얼굴에 있는 것이 물인지 눈물인지 분가조차 할 수 없었다.

"당최 오늘 갑자기 왜 이러우. 간밤에 꿈자리가 사나웠수?"

소연은  이번에는 걱정되는 듯 그에게 물어보았다. 훈은 아무 대답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말로 다 꺼내지 못할 정도로 사무치는 그리움이 복받치고 있었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전기가 일 듯 반짝이기 시작하였다. 또 다른 기억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집 뒤에 자리 잡고 있는 야산 둘레길 산책, 점심으로 동네 앞 국숫집에서 국수를 먹고 가벼운 낮잠. 하루의 기억들이 스파크를 튀기며 그의 머릿속을 밝히기 시작하였다. 비로소 기억의 마지막 불빛이 반짝이자 훈은 흠칫 놀라게 되었다.


"아니, 이이가. 당신 대체 왜 그러우?"

소연은 양손으로 훈의 가슴을 살짝 밀치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자네 오늘은 나가지 말고..."


그 순간 그의 귓가에서 "딱" 하는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주위의 어색한 공기가 감도는 듯하였다. 눈앞에 있는 소연은 갑자기 미동도 없이 그를 바라본 채 멈춰져 있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들이 멈춘 것만 같았다.

"임자.. 임..."

훈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때 갑작스레 누군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 내가 말을 안 해 준 사실이 있구먼."

고개를 돌려보니 뿔테 안경을 낀 학수였다.

"자네는 기억을 찾는 거지만 기억 속의 아내는 그날을 살고 있는 것일세."

훈은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듯 그를 다시 흘겨보았다.

"아. 좀 더 쉽게 설명하면 말이지. 마치 점쟁이처럼 그날의 일을 그녀에게 말하면 안 되는 것일세."

"하지만..."

"자네 잊지 말게."

여드름 투성의 학수가 뿔테를 다시 고쳐 쓰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보며 말하였다.

"이건 이미 벌어진 기억일세. 어떻게 되어도 자네는 막을 수 없어."

"만일 그렇지 않는다면??"

"함 두고 보게나."

학수는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를 띠더니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꿈쩍도 않던 소연이 그에게 다시 말을 걸고 있었다.


"뭐라고 했수?"

"아.. 아니야."

훈은 황급히 돌아서며 수건을 들어 젖은 얼굴을 닦았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소연은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더 이상 묻지 않고 기다려주는 것이 그녀의 장점이기도 하였다. 훈은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장점이 얼마나 고마운지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서 나가지"

훈은 깊게 한숨을 쉰 후 돌아서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아침 공기는 제법 쌀쌀했다. 며칠 전 내린 비로 곳곳에 물웅덩이가 보였다.

"후우"

마스크를 비집고 하얀 김이 모락모락 나왔다. 선선했던 가을  공기가 차가운 물에 살며시 몸을 적신 느낌이 들었다. 잘 닦여진 인도길 양옆에는 자로 정확히 잰 듯 심긴 은행나무들이 서있었다. 곳곳에 떨어진 은행들이 일부는 터져 짙은 향이 코를 찔러댔다.


7분? 8분 정도 지났을까?

간이로 만든 듯 시멘트로 듬성듬성 쌓아 올린 시멘트 계단이 보였다. 제법 모양을 갖추려는 듯 오른쪽에는 가슴팍까지 쌓아 올린 빨간 벽돌기둥 위에 낡은 간판이 간신히 매달려있었다.

'철쭉산'

높이가 100m도 채 되지 않은 작은 야산이다. 산봉우리가 서울과는 반대 방향이라 묘지로 쓰일 수 없어 역산이라 불리었다. 그래서 이를 알리는 경고문이 담긴 나무 표지판을 곳곳에 박아두어 철쭉산이라 불린다고 하였다.


"아침에는 산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히 가우"

소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훈은 그녀를 쳐다보았다. 찬 공기 때문에 두꺼운 후두를 뒤집어쓰고 하얀 마스크를 썼지만 반짝이는 눈빛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녀 입가에 띄어진 미소가 그려졌다.

밤사이 맺힌 이슬로 땅이 촉촉한 진흙이 되어있었다. 질퍽이며 하얀 운동화가 더러워져 훈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런 훈의 마음을 돌리려는 듯 소연은 마스크를 벗으며 깊게 심호흡하였다.

"하아. 당신도 마스크를 잠시 벗고 이 냄새를 맡아봐요!"

처음엔 차가운 공기가 폐를 콕콕 찌르며 아무런 향을 못 느꼈다. 그러나 잠시 뒤 은은한 향이 콧 속으로 들어오며 가슴을 가득 채웠다. 나무들 사이에서 뿜어대는 피톤치드향이었다.

"내 말이 맞죠?"

소연은 밝게 웃으며 말하였다. 순간 소연이 몸을 비틀거렸다. 돌덩이에 발이 걸린 것이었다.

"조심 좀 하지."  나무라듯 말하였지만 걱정스러운 듯 훈은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걷다 보니 작은 돌계단이 나왔다. 돌계단이 어디까지 이어지나 고개를 들어 보니 꽤 길었다.

"수십 년을 오르지만 계단이 줄어들진 않나 보우" 소연이 장난스레 말했다. 중간쯤 오르자 숨이 차오르기 시작하였다.

쌀쌀한 날씨에도 이마에 어느새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좀 쉬었다 갈까요?"

"허억허억 그럴까?"

잠시 멈춰 선 그들은 뒤를 돌아보며 그들이 올라온 계단을 바라보았다. 제법 올라온 듯 계단이 길게 늘어뜨려있었다.

"허허 우리 인생 같수."

"뭐가 말이유?"

뜬금없는 소연의 말에 의아하다는 듯 훈은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니.. 젊었을 때는 나이 먹는 게 이 계단 같아서. 언제 다오르나? 그랬죠."

"그렇게 앞만 보고 오르느라  제가 이렇게 나이가 들었는지 몰랐어요.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동의를 구하듯 그녀는 훈의 눈을 바라보며 잠시 말을 멈췄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네. 우리의 계단도 이제 거의 끝나겠지?"


"그렇겠죠. 그래도 잊지 마요. 늘 내가 말했죠? 오늘이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라는 걸"

그녀의 말이 귀에 닿자 그의 가슴이 왠지 모르게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머리 한편에 빛이 들어오며 그녀의 말이 메아리쳤다. 항상 그 자신이 나이가 들었다고 습관처럼 말할 때마다 습관처럼 답해주던 그녀의 말이었던 것이다.


"오늘 점심은 국수 어때요? 장수의 의미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소연이 꺼낸 국수라는 말에 훈은 깜짝 놀랐다. 산책을 하며 잠시 잊은 그날의 일이 다시 떠올랐다.

"아니야. 오늘은 그냥 집에서 있는 밥을 먹지그래"

훈은 고개를 설레 흔들며 말하였다. 그런 그의 반색에 살짝 놀란 듯 소연은 눈이 동그래졌으나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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