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복기는 곧 여행의 연장이다
여행을 하면 일행들과 신선한 대화를 많이 나눌 수 있다. 일단 일상을 벗어나 새로움이 넘치니 서로 알려줄 얘기도 많고 감상도 각자 다르기 마련이니 당연하다. 여행을 준비할 때부터 여행지에 대한 정보나 각자의 선호에 대해 나누기 시작해 마주한 풍경을 바라보며, 이동하며 이야기꽃을 피우다 저녁에는 숙소에 모여 앉아 한 잔 기울이며 그날의 감상을 나누곤 한다. 가끔 일행들이 흩어져 구경하고 온 날은 사진을 보여줘 가며 서로에게 생동감 있는 간접체험을 시켜준다.
좋았던 여행은 당연히 그 자체로 좋은 추억이 되고 힘들었던 여행도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미화되어 그 당시보다 나은 추억이 된다. 여행을 다녀와 뒤풀이를 해보니 감상이 풍부해지는 느낌이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여행 중엔 놓쳤을 여러 기억들이 서로의 입을 빌어 떠오르곤 한다. 여행 직후 헤어지는 뒤풀이는 아쉬움을 달래고 당장의 소감을 나누는데 좋지만 의외로 몇 개월 지나 모여 얘기해보면 옅어졌던 기억들이 살아나며 농익은 이야기가 된다.
짝꿍이 브런치에 월간 유랑기를 연재하고 있다.(https://brunch.co.kr/magazine/wandering-logs) 어쩌다 보니 거의 매달 짧고 가깝게든 길게 멀리든 여행을 다니는 한 해를 보내고 있다. 통장은 텅장이 되다 못해 쥐꼬리만 한 신용으로 살아야 할지 몰라도 마음은 풍요로운 한 해였다. 1월 호치민 여행을 시작으로 2월 삿포로, 3월 오키나와로 이어지는 여행기다. 재밌는 건 함께 여행했던 일행들이 작정하고 다시 만나 몇 시간 동안 그 여행을 복기하는 작업이다. 여러 달 흘렀으니 스마트폰의 사진을 훑으며 대략적인 타임라인을 복기하고 다양한 주제에 대한 감상과 추억을 나눈다.
처음엔 너무 진지하게 인터뷰하는 느낌도 들어 어색하고 우스웠는데 해보니 꽤 즐겁다. 벌써 여러 달 흘러버린 여행인데 다시 곱씹으면 디테일이 하나하나 살아난다. 그때 미처 나누지 못했던 감정이나 감상도 떠오르고 어떤 건 다른 여행이나 생활과 엮여 발전하기도 한다. 그렇게 지나간 여행을 안주삼아 한 잔 하면 몇 시간은 순간처럼 흐르고 마치 아직도 그 여행이 끝나지 않은 기분이 든다. 다녀온 여행의 완성도는 높아지고 아련한 그리움은 자극되어 또 다른 여행을 꿈꾸게 한다.
얼마 전에 오키나와 여행에 대해 얘기할 때는 교대역 근처 오키나와풍 식당을 일부러 찾았다. 일행 모두에게 가까운 망원동의 좋은 식당도 있었는데 더 본격적으로 꾸며둔 곳으로 발이 향했다. 도착해서 매장 안팎을 살펴보니 오키나와 느낌을 제대로 냈다. 합정 등지에 흔히 보이는 우스운 일본풍 흉내가 아니라 오키나와에서 실제로 많이 볼 수 있는 그림과 물건들이 분위기를 한껏 돋웠다. 관리가 잘 돼 맛있는 오리온 생맥주 한잔씩 기념 삼아 마시며 본격적인 여행토크를 몇 시간 동안 나눴다. 10개월 전의 여행인데 추억을 꺼내다 보니 역시 누군가는 놓쳤던 장면이나 여행 후에 확장된 지식으로 풍성한 대화를 했다.
이를테면 일행 중 한 명은 오키나와에서 미군기지를 여러 번 지나쳤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됐다. 즐겁게 구경하고 나온 추라우미 수족관 얘기에 이르러선 우리 모두 돌고래쇼 같은 동물쇼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돌고래쇼가 끝날쯤 도착해서 볼 수도 없었으나 볼 생각도 없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들렀던 아주 작은 휴게소의 점심과 아이스크림은 새삼 우리 모두에게 큰 추억이 돼있었다. 마지막 날 들렀던 이자카야 주인과 점원들의 환대가 큰 기억이고 선물 받은 오키나와 전통 젓가락은 모두가 잘 사용하며 틈틈이 오키나와를 곱씹고 있었다.
여행의 복기는 이처럼 여행의 연장이 되고 추억에 조미료를 더하는 일과 같다. 여행에서 돌아와 일상으로 돌아갈 때 아쉬움이 남는다면 일행들과 시작부터 곱씹으며 안주 삼아도 좋겠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희미해질 즈음 오랜만에 일행과 만나 작정하고 복기를 해보기를 추천한다. 생각보다 또렷하게 돌아오는 기억과 함께 과거의 여행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다가올 여행을 꿈꾸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