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의 하늘은 유독 겨울에 예쁘다. 그저 느낌인지 모르겠지만 여름과 겨울을 여러 번 겪어보니 그렇다고 생각된다. 루앙프라방에서 메콩강 너머로 지는 해를 보기에도 겨울이 좋다. 라오 북부를 겨울에 찾으면 낮에는 조금 덥다 싶지만 그늘에 들어가면 편안하고 밤에는 조금 쌀쌀한 공기가 맞이한다. 도로가 잘 포장된 나라에 사는 우리에겐 불쾌할지 몰라도 다시 맡으면 또 반가운 흙내음과 밥 짓는 장작의 연기도 지천이다.
겨울 라오의 석양은 정말 아름답다
이곳에 오면 시내에서 십여분 달리면 닿는 작은 마을의 학교를 꼭 찾는다. 봉사를 빌미로 몇 번 들렀던 곳인데 정이 많이 들어 항상 마음 한편에 자리한 곳이다. 예전엔 흙바닥에 가지 친 나무를 기둥 삼아 볏짚을 덮어 교실로 썼지만 지금은 번듯한 건물이 들어선 곳이다. 라오의 교원 시스템을 잘 모르는데 이동이 뜸한지 갈 때마다 같은 얼굴들이 반겨주신다. 말도 잘 통하지 않고 연락 수단도 마땅찮아 찾기 전에 미리 알릴 길이 없어 그저 찾아가는 수밖에 없는 곳이다.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시골의 짧은 비포장길을 달려 학교에 닿으면 버선발로 나와 안아주시는 선생님들이 계시다. 나눌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아도 몇 분이고 몇 시간이고 앉아서 손 잡고 얘기하곤 한다.
너른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을 나서면 반가운 얼굴이 산다. 공사장에서 십장으로 일하시는 어르신 댁인데 작은 집에 대가족이 모여 산다. 기술은 있는데 가진 돈이 없어 문틀은 있는데 문은 없고 창문틀도 휑한 그런 집이다. 한 번은 일행들과 좁은 골목을 돌아 마당으로 들어서니 쪼그리고 놀던 꼬마가 맨발로 달려와 안겼다. 1년에 한 번 잠깐 보는 얼굴인데 다섯 살짜리 아이가 어떻게 기억하고 반겨주는지 정말 신기하다. 매달려 안고는 작은 손으로 꼭 쥐고 놓지 않는다. 그러면 경계하며 짖어대던 강아지도 조금은 얌전해지고 잠시 기다리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맞아주신다. 보고 싶었다고, 그리웠다고, 그리워서 눈물을 흘렸다고 손을 쥐고 놓지 못하신다.
아이가 달려 나오던 할아버지네 마당
들를 때면 항상 할아버지를 모시고 학교에서 선생님들과 간단한 식사를 한다. 주로 선생님들이 준비를 해주시는데 운동장 한편에 불을 피워 생선을 구워 야채와 함께 먹곤 한다. 영어 선생님이나 영어를 하는 친구가 없을 때면 짧은 라오어를 쥐어짜 내 이야기를 나누는데 가끔은 생각보다 깊은 대화가 되는 것도 보면 신기하다. 여기도 여느곳과 다르지 않아 애인이 있는지, 결혼을 했는지 묻고 빨리 결혼하라고 종용하곤 한다. 이때를 위해 외워둔 라오어 표현이 있는데 '댕안 맨 날록', '결혼은 지옥이다'를 시전 하면 모두 자지러지게 웃고 이 주제를 넘길 수 있다. 아름다운 석양 뒤에 밤이 오면 전기 시설이 열악해 랜턴에 의지하곤 하는데 깜깜한 운동장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별이 쏟아질 듯 보인다. 몽골 하늘에 비할 수는 없지만 한국에서는 언제 이런 걸 봤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니 가끔 걸어 나가 가만히 깜깜한 겨울 하늘을 바라보곤 한다. 달까지 예쁜 날이면 덩달아 기분도 좋아진다.
파로 속을 채운 생선구이 삥빠는 언제 먹어도 맛있다
비행기 환승을 위해 수도 비엔티안에 들렀을 때 5년 전 고아원 학교에서 만났던 학생들과 연락이 닿았다. 한 명은 한국어를, 다른 한 명은 웹 개발을 공부하는 대학생이 되었다. 여행 중엔 좀처럼 한식을 먹지 않지만 한국어를 공부하는 친구를 위해 시내 한식당에서 찌개며 제육이며 나눠 먹으며 회포를 풀었다. 쑥스러워 수업에 잘 들어오지 못하고 수업 중에도 별다른 말이 없이 미소만 짓던 T는 대학 교복을 차려입고 나왔다. 아직은 말이 미숙하지만 제법 뜻이 통하는 한국어를 구사해서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헤어질 때 못내 아쉬운지 문자 그대로 발을 떼지 못하기에 등 떠밀다시피 보내고 겨우 돌아섰다.
두 번째 친구는 평소 잘 못 먹어봤을 음식을 접하게 해 주려 미국 음식 식당에서 만났다. 폭립, 버거, 타코 등을 아주 맛있게 하는 집이었다. 5년 전에도 컴퓨터 기초 수업에서 아주 열심히였던 S는 우리로 치면 서울대 격인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쉬는 시간을 줘도 한 번 일어나지 않고 열심히에 질문도 많이 하던 친구니 다른 공부도 두루 잘했나 보다. 떠듬대던 영어도 아주 훌륭해져서 만나본 라오인 중 손에 꼽는 실력이 되었다. 쑥스러워하면서도 아마존, 구글 같은 기업에서 일하고 그런 IT 신화를 쓴 사람들처럼 되고 싶다 말한다. S와 헤어질 때도 마찬가지였다. 포옹하고 악수하고 먼저 출발하라 인사했지만 그는 동상처럼 서서는 발도 입도 떼지 못했다.
사람만 그리운 게 아니라 이 음식도 그립다. 비엔티안에 다시 가면 꼭 먹을 거다.
루앙프라방에 일행들과 묵은 호텔에 외출했다 돌아오니 프론트 직원이 일어서 웃으며 반겼다. 그런데 안부 인사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묻는 "Are you Mr. Kim?"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얼굴을 쳐다보니 이럴수가, 수도에서 만났던 S와 절친인 N이 활짝 웃고 있었다. 뒤따라 들어온 일행도 처음엔 무슨 상황인지 모르다가 알아보곤 반가움의 소리를 질렀다. 그 친구도 우리가 어지간히 반가웠는지 아니면 며칠 봤다고 선생 대접 해주는건지 머무는 내내 로비에서 우리를 보면 벌떡 일어나 활짝 웃었다. 새삼 세상은 좁고 잘하고 살아야 한다는 다짐을 다시 하게하는 반가운 만남이었다.
학교 선생님들과 할아버지는 왜 그렇게 반겨주실까. 교실을 짓는 활동을 할 때 기껏해야 인사 나눈 게 전부였던 거 같은데 어떻게 정이 들었을까. 말이 통하지 않으니 짧은 시간 얼굴 마주한 게 다인데 말이다. 할아버지는 단원들과 땀 흘리며 정드셨을 수 있겠다 싶었지만 중간에서 관리하던 나와는 함께 땀 흘린 적도 없으니 더 신기하다. 몇 해 전 마지막 날 일정상 나는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떠난 적이 있다. 조수석에 타려 차를 돌아섰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할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셨다. 울며 부둥켜안으시고는 건강하라고 꼭 돌아오라고 하시는데 바빠 정신없던 내가 선글라스 속으로 눈물 꽤나 흘렸던 기억이 있다. 돌이켜보면 다른 이들과 나누지 못한 인사를 대신한 듯한 생각도 든다.
몇 시간 동안 비슷한 얘기만 하고 또 하는 대화를 나누는 선생님들은 집에 돌아가는 일정을 묻고 또 물으신다. 그리고 여행 중이거나 환승하러 들르는 다른 도시에 갔을 때 가끔 선생님들 전화를 받는다. 당연히 무슨 말을 하는지 서로 잘 알아듣지 못하지만 그래도 목소리를 듣고 싶으신지 전화를 거신다. 알아듣는 말이 뻔해 그런지 여행자에게 건네는 인사의 레퍼토리는 늘 비슷해서 또 올 때까지 건강하라는 당부를 하신다. 다시 만나려면 내가 라오로 와야지 이분들이 한국으로 오실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 또 만나자는 말씀을 또 돌아오라는 말씀으로 대신하신다. 만났을 때나 전화받을 때를 합하면 족히 수백 번은 듣는 말이다.
고아원 학교에서 컴퓨터 기초를 가르쳤던 기간은 고작 보름 남짓이다. 편차가 있었지만 컴퓨터를 처음 써보는 학생들도 있었는데 보름새 느는 실력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가능성으로 가득한 이 아이들에게 각자의 재능에 맞는 아주 약간의 자극과 등 떠밈이 계속되길 바랐다. 시간이 흘러 어엿한 대학생이 된 T와 S를 마주하니 반가움을 넘어 뭉클했다. 그림판이니 오피스 따위를 배우던 아이가 제일가는 대학에서 웹 개발을 전공한다니 고작 보름 동안 내가 한 게 무엇이겠냐만 뭔지 모를 좋은 성적표를 받은 기분도 들었다. 앞으로 걸어 나갈 그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어쩌다 한번 찾으면 버선발로 맞아주시는 환대도 이별이 익숙한 아이들의 떼지 못하는 발도 스치는 인연에겐 과분한 대접이다. 나는 언제 스치는 여행자에게 이런 대접을 해준 적 있었나. 그러니 앞으로 내가 있을 어딘가에서 마주치는 누군가에게 이 대접들을 나눠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