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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멀스멀 Mar 19. 2019

하루 종일 숙소에 누워있어도 좋은 게 여행이야

조금 느슨한 여행 이야기

 막 새해로 접어드는 카운트다운을 하기 직전에 도심 구석의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늦은 밤 공항에서 한참을 기다려 택시를 잡았더니 맥주 한잔 바라는 마음도 사치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라오스의 가게들은 우리나라처럼 늦게까지 열지 않고 게스트하우스는 보통 통금이 있기 마련이니까.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해 샛노랗게 칠한 벽과 초록색 창틀 너머 보이는 따뜻한 조명에 조금 안도했다. 멜빵바지에 빵모자를 쓴 직원들이 늦은 밤 도착한 여행자를 환한 얼굴로 맞아준다. 카운트다운을 앞두고 삼삼오오 모인 여행자들은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취했는지 술에 취했는지 다들 들뜬 듯했다. 체크인을 하고 도미토리에 안내해준 직원이 짐만 풀고 빨리 나와서 파티에 합류하라 보챈다. 위스키 2샷을 무료로 준다며. 워낙 술을 좋아하니 택시에서도 비어라오 생각뿐이었지만 세상에, 공짜 위스키라니 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배정받은 2층 침대 아래칸은 여태껏 가본 어떤 도미토리보다 넓고 깨끗해서 기분이 더 좋아졌다.


 게스트하우스는 정면에 카페가 있고 라운지로 쓰이는 작은 중정을 지나면 도미토리 건물이 나오는 구조였다. 택시에서 내릴 때의 첫인상부터 실내까지 분위기가 아늑했다. 샤워실과 세면대까지 둘러보고 나니 여기 주인은 분명 서양에서 생활을 했겠거니 싶었다. 귀중품을 캐비닛에 넣고 카페로 돌아가 파티에 합류했다...기 보다는 한편에 소심하게 앉았다. 딱 봐도 주인인 사내가 다가와 유창한 영어로 위스키를 권했다. 가짜 양주가 많이 유통되는 곳이지만 알게 뭐람. 나는 그리운 라오에 막 돌아왔고, 구글 지도 평점 4.9점만 믿고 고른 숙소는 첫인상부터 완벽했으며, 좋아하는 따뜻한 조명 아래서 새해를 기다리며 공짜 위스키를 받았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위스키 체이서로 세상 사랑하는 비어라오를 한 캔 시키고 음악을 들으며 여독을 즐기기 시작했다. 조금 아쉬움이 있다면 일행 둘 중 한 명은 오는 길부터 아파져선 골골대기 시작했고 멀쩡한 한 명은 주량이 약하다는 것인데 이 또한 아무렴 어떠랴 싶은 그런 밤이었다.


샷으로, 온더록으로, 그리고 얼음 넣은 비어라오와 함께


 프리 위스키는 분명 2 샷이라고 했지만 들뜬 주인은 위스키를 계속 따라주었다. 우리는 5박 동안 묵으면서 카페 겸 바에서 일하는 존John과 아주 친해졌다. 첫날밤부터 지켜보니 재주는 존이 부리고 주인은 그저 신이 나서 어깨에 잔뜩 힘주는 식이었다. 직접 따라줄 때도 있었지만 존에게 '따라줘' 하면 존은 멋들어지게 따라주고 말 상대도 해주는데 어쨌든 위스키는 주인장 소유니까. 분명 해외생활을 해봤을 주인은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며 즐기-생색내-느라 바빴고 우리는 존이라는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자리가 길어져 새해가 되자 잔뜩 취한 주인은 집으로 돌아갔다. 밤새 숙소를 지키는 퇴근한 존과 영국인 크리스Chris, 호주인 톰Thomas과 함께 앞마당에 자리를 잡고 2차를 이어갔다. 숙소 앞은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식사나 안주류를 파는 포장마차가 늘어서 있었는데 거기서 사온 파파야 샐러드(쏨땀)와 꼬치구이를 안주 삼았다. 그런데 그 파파야 샐러드는 쥐똥고추를 얼마나 넣었는지 내가 태어나서 먹어본 음식 중 손에 꼽을 정도로 매웠다. 매운걸 잘 못 먹는 한국인을 놀리고 싶었던 만취한 크리스는 거듭 고추를 집어먹으며 자기는 괜찮다고 허세를 부렸다. 다음날 오후 2시가 되도록 남자 도미토리 화장실에선 구토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크리스는 아마 많은 것을 배운 새해 첫날이 아니었을까 싶다.


분위기 좋은 카페 겸 바와 신중히 LP를 고르는 존


 수도에서 5박을 하고 라오스 북부 우돔싸이로 향하는 우리에겐 6일 차에 우돔싸이로 향한다는 걸 제외하곤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모두들 라오가 처음이 아니기도 했지만 랜드마크나 관광에 관심이 없었고, 사실 관심보다 돈이 더 없는 상태였다. 늦은 밤 공항에 도착해서 환전을 못했는데 1월 1일은 공휴일이라 이튿날도 환전을 할 수 없었다. 1년 전 라오에서 쓰다 남은 6만 원 정도 되는 낍Kip(라오스 통화)이 전부였는데 택시비에 맥주값 내고하다 보니 이마저도 여유가 없었으니 우리는 하루 종일 중정에서 시간을 보냈다. 늘어져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골골대던 일행은 기력을 회복했고 왜인지 멀쩡했던 일행은 골골대기 시작했다. 물갈이인지 숙취인지 알 수 없지만 바쁜 일정도 없으니 그저 쉬면서 회복하는 수밖에 할 일이 없었다. 달걀, 식빵, 라면, 우유, 주스 따위가 조식으로 포함되어 있었는데 주머니가 얇은 우리는 알아서 배를 채우고 침대로 들어갔다, 중정에서 늘어졌다를 하루 종일 반복했다.


 마주치는 직원들은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걸어왔는데 어디 가냐는 물음에 쉴 거라고 얘기하니 다들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늦은 밤 도착했으니 피곤한 것도 알 테고 한눈에 컨디션이 좋지 않은 일행도 보이는데 새벽까지 달린 게 이미 소문이 다 난 듯했다. 그렇게 종일 쉬다가 숙소 앞 골목에서 라오스식 쌀국수인 카오삐약과 꼬치구이를 사다 비어라오에 곁들여 저녁을 먹었다. 라오스와 동남아에서 수백 그릇의 쌀국수를 먹어봤지만 이 허름한 노점의 카오삐약은 단연 최고였다. 한 그릇 1,000원 정도의 가격인데 뼈 붙은 고기에 선지까지 내용물도 좋고 국수도 맛있었다. 현지식에 도전하는 서양인들도 있지만 많은 경우 위생 때문인지 꺼리기도 하는데 옆 테이블의 서양인들이 우리를 신기한 듯 쳐다봤다. 어떤 음식이냐 물으면 맛보러 건네주기도 하고 말도 몇 마디씩 섞으며 게스트하우스 특유의 매력을 즐겼다.


매일 시간을 보낸 부위기 좋은 중정과 단촐한 나의 조식, 그리고 1,000원 짜리 카오삐약


 3일 차가 되자 직원들은 우리를 이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체크아웃 시간이 지날 때까지 누워서 뒹굴대다 청소부가 들어오면 자리를 내어주고 중정에서 늘어졌다 기어 들어갔다를 여전히 반복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볼 때 우리의 하루 일과는 이랬으리라. 조식 시간 끝물에 기어 나와 소량을 섭취하곤 침대로 사라지고, 다시 나왔다 들어갔다 하루 종일 하는데 하는 거라곤 흡연과 음주밖에 없어 보였을 것이다. 실로 그러했다. 근처에 잠깐 산책을 나서 골목을 구경하기도 했고 환전도 하고 커피도 한 잔 마시고 했지만 일반적인 여행자의 활발함은 찾아볼 수 없었겠지. 호주인 친구 톰이 꼭 가보라고 한 재활병원에 방문한 게 6일 일정 중 가장 큰 일이었다. 베트남 전쟁 이후로 라오에는 아직까지 수많은 불발탄이 있다. 클러스터 폭탄Cluster bomb이 대부분인데 전쟁 때 다친 사람 말고도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인 재앙이다. 얼마나 불발탄이 많으면 식당이나 슈퍼마켓 같은 데서 입구에 장식처럼 쓰거나 집 기둥으로 사용하기도 할 정도다.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엔 폭탄으로 사지를 잃은 사람들의 재활을 돕는 병원과 작은 박물관이 있어 추천을 받고 방문했고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작은 전시 공간을 보며 멀리서나마 느껴지는 게 많았다.* 


왼쪽 처럼 생긴 클러스터 폭탄이 터지면 가운데 처럼 무수히 작은 폭탄이 떨어진다. 우측은 의족들.


 이어지는 4, 5, 6일 차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앞과 똑같았다. 수년 전 봉사활동 와서 잠깐 가르쳤던 학생을 식사시간에 만나기는 했지만 어차피 우리가 밥을 먹을 일정이었으니 대부분의 시간은 침대와 중정이었다. 직원들과 친해지는 만큼 그들의 의아함은 커졌지만 매일 우리의 대답은

"No plan."


 아마도 4일 차쯤, 베트남에서부터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는 톰은 낡은 오토바이를 존에게 선물하고 다른 오토바이를 구해 북쪽으로 떠났다. 시간이 맞으면 우돔싸이에 비행기 타고 들어가는 우리와 만나자며 인사했다. 5일 차에는 청소부들이 우리를 곁눈질하며 "저 한국인들 드디어 내일 우돔싸이에 간대." 같은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6일 차에 체크아웃 전까지는 한국인이란 단어와 우돔싸이란 단어를 몇십 번 들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모든 직원들이 주시하는 특이한 존재였던 것이다. 비엔티안에서 5박이나 하는 경우도 드문데 그 기간 동안 아무것도 안 하는 여행자라니, 신기할 법도 하다. 여러 날 같은 공간에서 정들었던 우리는 직원들과 기념사진도 찍고 다음 방문을 기약했다. 몇 주가 흘러 출국길엔 굳이 시간을 내 들러 반겨주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고 우돔싸이에서 만나자던 톰은 며칠을 머물며 우리와 시간을 보냈다.


 하노이에 두 번째로 갔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베트남에는 소규모지만 질 좋고 저렴한 호텔이 많아 그중 한 군데에 묵었었다. 친절한 직원들은 드나들 때마다 '오늘은 어디에 가는지', '오늘은 어디에 갔는지' 꼬박꼬박 물어보곤 했다. '추천해 줄까?' 하는 친절한 질문과 함께 말이다. 다리가 아파 지팡이를 짚을 때라 아마 유독 눈에 띄기도 했겠지만 정말 끊임없이 물어봤다. 그때도 7박 정도 했는데 나와 일행은 그저 앞에서 쌀국수 먹으려고, 반미 사 먹으려고 같은 말 외엔 할 말이 없었다. 골목이나 걷다 맛있는 현지식 먹는 것, 그게 우리 여행에서 계획이라면 유일한 계획이었으니까. 우리의 여행 스타일에 의아함을 느낀 그들은 슬슬 '하롱베이를 가보는 게 어때?' 식으로 적극 권유하기 시작했지만 우린 아랑곳 않고 숙소와 그 주변 골목만을 즐겼다. 내키지 않으면 조식을 거르고 느지막이 일어나 근처에서 쌀국수 한 그릇 먹고 방에서 빈둥대다가 저녁이 되면 다시 먹거리 사냥을 떠나는... 그런 여행.


 이런 스타일의 여행을 하다 보니 세계 3대 야경이니 하는 하코다테에서 전망대를 가지 않았다. 석양 지는 바다의 도리이가 예쁘기로 유명한 미야지마는 히로시마 여행의 필수 코스로 꼽히지만 두 번의 여행에서 코스트코 구경은 갔어도 미야지마는 가지 않는 그런 식의 여행을 한다. 그 대신 말도 잘 안 통하는 동네 식당에 들어가 현지인들이 먹는 음식을 먹는 게 즐겁다. 어쩌다 말이 통하면 현지인과 대화도 하고 술이나 안주를 추천받기도 하면 더욱 좋다. 도미토리든 호텔이든 숙소가 맘에 들면 침대나 라운지에서 보내는 시간들도 즐겁다. 히로시마에서 굳이 코스트코**를 갔더니 두 번 모두 주차장 펜스 넘어 스타디움에서 벌어지는 그 유명한(히로시마 시민들이 애정 하기로) 카프의 경기를 잠시나마 보는 행운도 있었다. 아마 숙제하듯 하는 도장깨기식 여행이라면 현지인을 사귀거나 카프의 경기를 곁눈질하지는 못했겠지.***


분명 코스트코를 갔는데 열정적인 팬들이 가득찬 경기장이 보였다.


 비엔티안, 하노이, 하코다테, 히로시마, 그리고 또 다른 곳 어디든 할 것 없이 자랑하는 관광지에 가지 않는 우리에게 의아함을 던지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러면 얘기해준다. 골목을 걸었는데 느낌이 좋고 예쁘다. 지금 머무는 이 숙소가 참 편안하고 좋다. 만나는 사람들이 친절해서 즐겁다. 이곳저곳의 음식들이 참 맛있다.


 그래서 아마 나는 또 올 것 같다고.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또 왔을 때 그때 보고 싶으면 전망대에 올라가도 되니까 괜찮다고. 나는 지금 참 즐겁고 행복한 여행을 하고 있고, 돌아가면 분명 그리울 거라고. 그래서 아마 다시 오면 전망대에 오르기보다는 여기를 다시 찾을 거라고.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분명 황홀하겠지만, 가는 길이나 관광객 인파를 생각하면 발길을 골목으로 돌리게 된다. 혹시라도 여행 중 컨디션이나 궂은 날씨 때문에 발이 묶인다면 아쉬워봐야 속상하기만 하니 그저 숙소와 골목을 즐겨보는 여행도 해보기를 추천한다. 여행의 새로운 재미를 찾을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COPE(Cooperative Orthotic & Prosthetic Enterprise) Visitor Centre at the Rehabilitation Centre

재활센터에 위치한 코프 방문자 센터. 클러스터 폭탄과 코프의 활동, 폭탄 피해 생존자들에 대한 전시가 이루어진다. 재활 센터 내에 작게 위치한 방문자 센터인데 전쟁의 참상과, 현존 하는 라오인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다. 매일 9시부터 18시까지 운영하며 입장료는 무료이다. 시설 내 모금함과 기념품 구매를 통한 후원을 할 수 있다. 위치는 구글 지도에 정확하게 나온다. https://goo.gl/maps/Vk4T2cdpp6t 

재활센터 정문으로 들어가 매점을 끼고 우측으로 돌아가면 곧 보인다.

한국에서 기증한 구급차가 주차돼있다. 방문자 센터 앞의 고양이. 고양이는 주로 옳다.


**코스트코 멤버십은 전 세계 통용이라 외국에서도 이용 가능하다. 단, 제휴 신용카드가 나라마다 달라 현금 결제할 준비를 해야 한다. 결제 시 간단한 양식에 이름, 전화번호, 주소 등을 적는 절차가 있지만 이용에 문제없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 구단과 마쓰다 줌줌 구장. 빨간색이 마스코트인 히로시마 카프에 대한 시민들의 애정은 대단하다. 식당이나 이자카야가 전부 카프로 도배된 곳도 있고 술잔, 슬리퍼, 사탕 등 그 무엇 하나 카프가 들어가지 않은 게 없다. 오랜 시간 리그 우승을 못하다가 최근 몇 년간 우승을 했다고 들었다. 마쓰다 줌줌 구장은 코스트코 히로시마점과 나란히 있어서 주차장에서 구장 안이 보인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 로고와 오랜만의 리그 우승을 자축하며 우는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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