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사촌오빠가 돌아오면서, 본가엔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사촌 오빠네, 그러니까 둘째 이모네와 우리 집은 친척들 중에서도 더 가까운 사이다. 같이 산 적도 있는 데다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항상 이모네와 세트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내가 7살이었고 아직도 충청도 말을 쓰던 시절, 우리 가족은 경주에 새롭게 터를 잡았고, 당시 1년간 이모네 집에서 객식구로 함께 지냈다. 낡은 한옥집 중간방은 오빠의 피아노가 있는 곳이자, 어린 내가 뒹굴거리던 방이었다. 나는 거기서 구몬 학습지를 풀었고, 피아노로 젓가락 행진곡 따위의 곡을 치곤 했다. 오빠의 일기장에 매니큐어를 칠했다가 혼쭐이 나기도 했고, 반대로 내 머리에 껌을 붙였다가 머리카락을 댕강 자르는 바람에 오빠가 억수로 혼난 적도 있었다.
우리가 살던 황오동은 봄이면 천마총 옆 돌담길을 따라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곳이었다. 벚꽃이 바람에 날리는 날이면 오빠와 나는 동네 꼬맹이들과 뛰쳐나가 꽃잎 잡기에 여념이 없었다. 가끔은 오빠가 뒷자리에 자전거를 태워주기도 했는데, 발목에 체인이 감기는 바람에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풀어주느라 애를 썼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의 소중한 유년시절을 떠올리면, 항상 거기엔 오빠가 있었다.
오빠는 어릴 적부터 피아노에 재능을 보였다. 이모 말을 빌리자면,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가 진열된 가게를 그냥 지나가려면 그 자리에서 발악을 하고 울어댔다고 했다. 꼭 들어가서 건반 한두 개라도 눌러봐야 직성이 풀리길래 동네의 작은 피아노 학원에 데려갔더니, 오빠는 각종 피아노 대회에서 상을 쓸어왔다. 가끔 나와 둘이 있을 땐 장난으로 공개수배 사건 25시의 시그널 음악을 피아노로 쳐대는 통에 잔뜩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어린 내가 보기에도 오빠는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어떤 날은 나보다도 더 철없어 보이기도 했지만, 피아노를 칠 때만큼은 달랐다. 그 길로 오빠는 피아노 전공생이 되었고, 이모와 이모부의 피땀 어린 뒷바라지 아래 명문대에 입학했고, 청춘의 시간을 바쳐 저 먼 독일 프라이부르로 유학행을 택했다.
시간과 비용 때문에, 유학 도중 오빠가 한국에 오는 일은 손에 꼽혔지만, 그래도 2018년의 크리스마스는 가족이 다 함께 보낼 수 있었다. 우리는 멋들어진 한옥 식당에서 한정식 차림을 먹었고, 오빠는 독일에서 유명하다던 당근 크림과 치약 등 기념품을 갖다 주었다. 오빠는 이주 정도를 머물렀는데, 오기만 하면 친구들 보느라 바빴던 오빠가 그때만큼은 이상하게 가족들과 시간을 많이 보냈다. 독일로 돌아가기 하루 전, 오빠와 이모부, 아빠는 셋이서 동네 고깃집에 가 삼겹살을 맛있게 구워 먹었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인생 사는 이야길 술 한잔 기울이며 늘어놨다고 했다. 그 삼겹살은 오빠와 아빠의 마지막 식사였다.
오빠는 아빠의 장례식이 있던 날, 시험을 앞두고 있었기에 그 사실을 몰랐다. 뒤늦게야 소식을 접한 오빠는 이모와 통화를 하며 몇 시간을 내리 울었다고 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전화를 건 오빠는 내가 처음 듣는 목소리로 슬픔을 전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얼른 오빠가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오빠가 연습하던 피아노곡은, 작곡가가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마음을 담아 만든 곡이라고 했는데, 클래식에 문외한이라 그 긴 이름은 다 기억하지 못하겠다. 아무튼 오빠는 그 음악을 연주하며 우리 아빠, 그러니까 이모부의 안녕을 온 마음으로 빌고 또 빌었다고 했다.
무사히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오빠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경주에 내려가, 이모와 이모부, 엄마를 챙긴다. 이제 60대, 70대가 된 가족들을 데리고 드라이브를 가기도 하고, 맛있는 밥을 사기도 한다. 멀리 있어 자주 내려가 보지 못하는 나 대신 오빠가 가족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주니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늘 오빠의 안녕을 걱정하던 아빠가 함께 있었더라면 참 좋았을걸 싶지만, 아마 아빠가 어딘가에 있다면 흐뭇한 미소로 오빠를 보고 있지 않을까. 오늘따라 오빠의 존재가 고맙고 또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