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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oise May 16. 2020

남겨진 자들


얼마 전 어버이날, 오랜만에 마스크로 단단히 무장하고 본가에 다녀왔다. 시국이 요란한지라 걱정이 꽤 됐지만, 오랫동안 아빠의 납골당에 가보질 못한 데다 날이 날이니 만큼 내려가기로 했다. 기차로 두 시간 정도 걸리는 본가에 내려갈 때면 기분이 좋아진다. 맘 편히 돌아갈, 나를 위한 공간 하나가 항상 우두커니 버티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축복일지도 모른다. 


집에 가는 길, 다육이를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 카네이션 꽃다발 대신 작은 다육이를 샀다. 그리고 아빠를 위해 색색의 카네이션이 몇 송이 꽂힌 꽃다발을 골랐다. 색이 참 곱고 예뻐서 아빠가 좋아할 것 같았다. 




납골당은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 위치해있는 만큼,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와는 거리가 꽤 멀었다. 마침 대구에 사는 이모네와 구십이 넘은 외할머니까지 납골당에 함께 오기로 했다. 거기에다 둘째 이모네와 사촌오빠까지 합세했으니 그야말로 대가족이 아빠를 보러 구비구비 올라간 셈이다. 


날씨가 어찌나 맑은지 눈이 부실 정도였다. 구름은 새하얗고 깨끗했으며, 주변을 둘러싼 푸른 산은 납골당을 마치 에덴동산처럼 보이게끔 만들었다. 늘 자연이 주는 감동을  즐길 줄 아는 아빠였으니 이곳에 있다면 매일 산책도 하고, 꽃도 한 송이 들여다보며 잘 지내고 있지 않을까 조용히 생각해보았다. 



허리가 기역 자로 굽어 지팡이가 없으면 옴짝달싹 못하는 외할머니는, 아빠의 납골함을 보더니 꺼이꺼이 울음을 터트렸다. 할머니가 납골당에 오신 건 처음이었다. 워낙 연로하시고 허리도 안 좋으셨던 데다, 혹여 충격이라도 받으실까 싶어 장례식장에도 못 오시게 막았던 터였다. 엄마 말을 빌리자면, 외할머니는 유독 우리 아빠를 예뻐했다고 한다. 그렇게 예쁘고 소중했던 사위가 이제 갓 환갑인 나이에, 구십이 넘은 당신보다 먼저 떠나버렸다는 게 얼마나 야속하고 원통한지, 할머니는 한참 동안 그렇게 울며 아빠를 그리워했다. 


아빠에게 준비한 카네이션을 두고, 잘 지내냐며 안부를 건넸다. 혹시 여기가 답답하진 않냐고 물어보긴 했지만 대답이 없었다. 다시 한번 그런 의문이 들었다. 죽으면 영혼은 어디론가 사라지는 걸까. 아, 어쩌면 아빠도 환생을 했을까? 아니면 별이 되었을까? 이 납골당은 단지 남겨진 자들의 마음을 풀기 위해 마련된 곳이 아닐까... 


"안에 들어가서 인사하고 왔나?" 

"아이고, 신수가 훤하고 살도 올랐더라!" 


주차를 하고 뒤늦게 납골당에 들어갔다 나온 이모부는, 아빠가 여기가 좋은지 살도 통통하니 찌고 보기가 아주 좋더라며 싱거운 소리를 했다. 우리는 그 말에 모두 한바탕 웃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고작 2년 전 똑같은 장소에서 눈시울을 붉히며 초췌하게 서 있던 우리는, 이제 웃을 수도 있게 되었다. 




납골당에서 돌아가는 길, 반대편 부지에 마련된 사촌 오빠네 할머니의 산소에도 잠시 들르기로 했다. 날씨도 좋은 데다 양지바른 꼭대기에 위치한 산소는 그야말로 명당이었다. 빼곡히 들어선 산소를 내려다보며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웃기긴 하지만, 그 경치만큼은 절경이었다. 


"아이고, 공기 좋다. 나도 떠나거든 여기다 묻어주오" 


할머니는 산소를 바라보고 내 옆에 앉아서는, 딸들에게 말했다. 이곳이 참 마음에 드니 나 가거든 여기다 묻어주라는 것이었다. 엄마가 대구에도 이런 좋은 곳이 많다고 만류했지만, 할머니는 끝까지 여기가 마음에 든다며 힘주어 말했다. 이모부가 허허 웃으며, 사위 옆에 계시고 싶으신가 보다고 말했다. 나는 가만히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하얗다 못해 반짝거리는 할머니의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거렸다. 


'이제 우리는 또 한 번, 남겨진 자들이 된다...' 


이모와 이모부, 엄마와 사촌오빠를 보면서 가만히 생각했다. 사실 할머니는 눈에 띄게 기력이 쇠한 게 보였다. 누가 봐도 할머니의 시계는 천천히 멈추어 가고 있었다. 우리는 '남겨진 자'의 고통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 본능적으로, 할머니와 곧 이별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또 누군가를 새롭게 맞이하고. 남겨진 자가 되기도 하고, 또 떠나는 자가 되기도 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평소엔 일상에 치여 별 생각이 없다가도 이렇게 죽음과 가장 가까운 공간에 오면 그 생각이 짙어진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죽음이란 것은 공평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동시에 인생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도. 언젠가 또다시 남겨진 자가 된다면, 참 많이 슬프겠지.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이별과 그로 인한 남겨짐을 나는 담담히 이겨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아빠가 사라진 세상은 슬프기만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남겨진 자들의 시간은 째깍째깍 잘도 흐르고 우리는 어느새 웃기도 하고 농담도 하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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