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본가에 다녀왔다. 못 본 새 본가 베란다에는 식물원을 방불케 하는 싱그러운 풀잎들이 자라고 있었다. 엄마는 요즘 나 대신 얘네 키우는 맛에 산다며 하루에도 몇 번씩 베란다에 나가 서 있었다. 한참 물을 주고 나면 시간이 삼십 분은 훌쩍 지나 있었다. 땀을 흘리며 간이 의자를 두고 베란다에 앉아 있는 엄마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그 모습이 웃기고 귀여워 사진을 찰칵 찍었다. 그날 점심으로 엄마가 키운 방울토마토를 따 샐러드를 해 먹고 서울로 돌아왔다.
새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적응하느라 온 몸과 마음이 지쳤다. 특별히 바쁠 것도 없는 일상이지만 갑자기 생활 패턴이 바뀌니 늘 졸리고, 몸이 마음처럼 쉽게 따라주지 않으니 짜증도 났다. 바쁘다는 핑계로 엄마와 주고받은 카톡은 아주 간결했다. 밥은 먹었냐는 말에 ㅇㅇ. 어디냐는 말에 집. 정확히 말하면 대화가 아니라 생존 신고 정도였다.
며칠이 지나고 드디어 휴일, 낮잠을 늘어지게 자다가 눈만 뜬 채 누워 휴대폰을 뒤적거렸다. 그러다 엄마를 찍은 사진을 봤다. 화초 더미에 둘러싸여 앉아있는 엄마를 보는데, 엄마의 나이가 보였다. 전에는 한 번도 느낀 적 없던 세월의 무게가 실감 났다.
'어째 갈수록 외할머니랑 꼭 닮은 것 같네...'
보이는 건 나이뿐만이 아니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이 유달리 외롭게 느껴졌다. 순간 미안함이 몰려왔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다고, 엄마한테 살갑게 연락 한 통 먼저 못했을까. 혹시 딸내미 바쁜데 귀찮게 할까 봐 고민하다 한 통 힘주어 보낸 연락을, 내가 매몰차게 끊어버린 건 아닌지. 엄마의 하루는 나보다 훨씬 길고, 고요할 텐데.
전화를 걸었더니, 나와는 다르게 신호음이 몇 번 가지도 않았는데 엄마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린다. 뭐하냐는 말에, 아침으로 커피 한 잔 내려먹고 이제 청소하려고 한다... 티브이에 하는 건강프로에 이런 게 나오더라. 영양제는 잘 먹고 있냐... 속사포처럼 이런저런 말들이 쏟아진다. 끝에는 또 언제 내려오냐는 말도 빠지지 않는다. 길어지는 수다에 나도 이 얘기, 저 얘기 얹다가 푹 쉬라는 말로 전화를 끊으려는데 엄마가 나에게 한 마디 던졌다.
"아무리 가족 간이라도 연락은 신경 써서 해야 하는 기다. 가족이라고 무조건 정 있는 게 아니라, 그만큼 노력을 해야 정도 더 붙고 하는 거라고."
엄마의 뼈 있는 말에 뜨끔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전화를 끊고 가만히 생각했다. 엄마와 떨어져 산 지 10년, 그동안 나는 그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엄마와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수록 깨닫는다. 어쩌면 모든 관계 중, 가장 노력이 필요한 관계는 가족일 것이라고. 문득 베란다에 고요히 앉아 있는 엄마의 길게 늘어난 그림자가 가슴에 맺힌다. 먼 옛날, 엄마가 나에게 말을 틔워줬던 것처럼 이제는 내가 엄마의 든든한 말동무가 되리라, 못난 딸은 오늘도 다짐만 하나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