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도 어느새 추석까지 지난 걸 보니 끝자락에 왔구나 싶다. 시간의 속도가 신기하면서도 때로는 소름이 끼친다. 분명 스무 살 이전까지 내 하루들은 느리고 느렸는데. 어릴 적 내 시간들은 그렇게 더뎠는데, 다 자라고 난 후엔 자전거를 타고 지나치는 풍경 같다. 어디선가 "그게 다 나이 들수록 기억력이 줄기 때문이야"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정말 그런 건가 싶다.
시간이 빨리 간다는 것은 무섭지만 한편으로는 고맙다. 힘들고 절망스러운 기억들도 시간에 기대어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아빠가 나오던 꿈도 이제는 거의 꾸지 않는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게, 명절만 되면 꿈에서 아빠를 본다. 이번 꿈에서 아빠는 무표정으로 나왔다. 뭘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데 그 표정은 생생하다. 생기 있는 모습이 아니라,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라 깨고 나서도 그 장면이 잊히지 않았다.
"꿈에 죽은 사람이 무표정하게 나오면 진짜 너를 보러 온 거래"
미신이나 점에 관심이 많은 막내 이모가 예전에 해준 말인데 뇌리에 깊이 박혔다. 그 이유인즉슨, 진짜 귀신은 무표정한 모습이라는 거였다. 웃거나, 우는 모습은 자기의 상상이 반영된 거라고. 정말일까? 미신을 그다지 믿지 않기 때문에 한 귀로 듣고 흘릴 법도 한데, 막내 이모 말은 그저 믿고 싶다. 추석이라 아빠가 기별이라도 하러 왔을까? 내가 보고 싶어서 들렀나? 이런 생각을 하다가 오랜만에 아빠의 모습이 담긴 사진도 꺼내보곤 한다.
간소하게나마 아빠를 기리는 상을 준비했다. 아직도 제사상에 어떤 순서로 음식을 놓는지, 술잔을 몇 번 돌리는지 어색하고 폼이 영 엉거주춤한 걸 보면 아빠는 웃을까 싶다. 오랜만에 납골당에도 다녀왔다. 코로나 19 때문에 나름 치열하게 예약을 하고, 마스크를 끼고 중무장한 채 갔더니 가뜩이나 차분한 실내가 더 조용했다. 이번에는 왜 이렇게 아빠의 사진이 어두워 보였는지. 예고 없이 간 터라 급하게 납골당에 모셨지만, 나중에는 볕 좋은 곳에 따로 자리를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엄마는 납골당을 나오며 인생 참 부질없다고 혼잣말을 했다. 그러더니 나한테 눈치를 준다. "그러니까 부모 살아계실 때 잘해야 하는 거야!" 그 말을 듣던 이모는 "아무리 잘해도 가고 나면 뭔들 가슴에 안 박히냐"며 씁쓸해했다. 맞는 말이다. 아무리 잘하고 싶어도 부모 사랑 못 따라가는 게 자식 마음. 아빠가 가고 난 뒤 가슴에 사무치는 모든 말과 행동들은 감히 셀 수도 없다.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면 가슴만 아프다. 그래서 속으로 또 조용히 다짐해 본다. 아빠를 사랑하는 만큼, 아빠가 생전에 가장 아꼈던 엄마에게 잘해야겠다. 그리고 아빠가 생전에 가장 사랑했던 나한테도 잘해야겠다. 어딘가에서 보고 있을 아빠가 활짝 웃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