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loise Sep 10. 2020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며칠 전이었다. 팀원들과 다 함께 구내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는데,  본가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본가까지)  KTX 타면 금방이지 않아요?"

"네. 근데 제가 사는 동네까진 또 한참 버스 타고 들어가야 해요" 

"(웃으며) 아부지가 데리러 안 와요?" 


상사가 웃으며 던진 말에 나는 순간 고민했다. '못 들은 척해야 하나?' 아니면 진지하게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라고 해서 모두가 불편한 식사 자리를 만들어야 하나? 


한국말을 정말 사랑하지만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돌아가셨어요'라는 말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감을 못 잡겠다는 거다. 이럴 땐 영어가 부럽다. 외국 영화에서처럼 "oh, I'm so sorry"라고 하면 간결할 텐데. 도대체 우리말로 "그것 참 유감이네요."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기에는 애매하게 사이즈가 안 맞는 옷을 걸친 느낌이다. 그렇다면 나는 굳이, 다 함께 밥 먹는 자리에서, 상대방이 애매한 문장들 속 하나를 골라내려고 애쓰는 모습을 봐야 할까?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이런 생각들이 앞다투어 드는 가운데 내 입은 이미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요즘은 그렇지도 않더라고요. 하하하!" 


팀장은 아들만 있는지라, 딸내미였음 버선발로 뛰어나갔을 거라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옆에 앉은 팀원도 우리 아빠는 아직도 맨날 데리러 나온다며 자랑 섞인 애정을 과시했다. 적당한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나는 그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가끔은 부모가 모두 살아계신 게 당연한 듯 쑥 들어오는 질문들이 있다. 물론 이해한다. 가는 데 나이 없다지만, 부모를 여의기엔 서른 살이 (일반적으로) 어린 나이니까. 더군다나 수많은 대화 중에서 엄마 아빠 얘기는 적어도 한번쯤은 하게 되니까. 그들이 그 어떤 악의도 없이 말을 건넨다는 것을 잘 안다. 문제는 '나'다. 거짓말을 하고 난 후의 찜찜한 기분은 오롯이 내 몫이다. 이럴 때 센스 있으면서도 싸해지지 않는 분위기를 만들 만한 말이 뭘까. 가만히 생각해보다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나는 머쓱해할 그들을 배려하는 걸까, 아니면 내 아픈 고통을 남들이 알게 되는 게 싫어서 자기 방어를 하는 걸까? 


전이든 후든, 둘 다든 간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나는 안 그래야지'라는 것. 아무리 악의 없이 한 말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가정은 부모와 자식으로 똘똘 뭉쳐진 것'이라고 단정 짓는 일종의 편견일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가정만큼, 또 얼마나 많은 사연이 있겠나. 어쩌면 나도 아빠의 사고를 겪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아빠가 돌아가신 지 2년. 정신없이 몰아치던 순간들도 다 지났고, 이제 그 일과 둘러싼 모든 것들에 담담해졌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훅 들어오는 질문에 훅, 대답하기엔 멀었나 보다. 그러나, 한 가지 깨달은 건 있다. 내가 악의 없이 '무심코' 던진 말이 누군가에게는 고민을 하게 만들진 않았을까. 


아직도 정답은 모르겠다. 그저 나이를 먹어 갈수록 자연스러워지겠지 할 뿐. 






이전 07화 바쁘다는 핑계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