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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근정 May 29. 2022

이제는 멀어진 나의 눈부신 친구들에게

너는 나의, 나는 너의 눈부신 친구니까

사람 사이에는 마음의 거리가 있다. 조여졌다 느슨해졌다를 반복하며 단단해지고,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지며 이어진다. 그런데 어느 순간 따라 집기 어려울 정도로 멀어졌구나라고 느낄 때가 있다. 보통 진학, 취업, 결혼, 출산처럼 인생의 변곡점에서 그런 순간을 마주하는데, 요즘 특히나 큰 변화를 느끼는 지점은 ‘출산'이다.


결혼과 출산은 아직 나에게 먼 이야기라고 느꼈던 시기에 일찍이 결혼해서 육아를 하고 있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꼈다. 육아의 고단함을 토로하는 이야기에 온전히 공감할 수 없었다. 어떻게 위로해주어야 할지 난감했다. 아이 둘을 연달아 키우며 4년을 휴직하느라 복직하면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는 친구의 고민을 들었을 때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 새로운 프로젝트를 함께 맡게 된 선배가 갑자기 돌봄 육아 휴직에 들어가면서 내가 그 몫까지 떠안게 된 일이 떠올라 잠시 기분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 이야기가 대부분인 친구와의 대화가 즐겁지 않고, 프로젝트 중간에 육아로 휴직하는 동료를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 아이라는 무해한 존재에 대항하는 것처럼 느껴져 죄책감이 들었다. 아마 그들도 사회생활에 대해 늘어놓은 나의 넋두리가 마음에 와닿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시절 나의 무심함으로 인한 말실수는 세상이 아이 중심으로 바뀐 친구에게 상처를 주었고, 지금이 중요한 나는 여전히 과거에 머무르는 듯한 친구의 태도에 상처를 받았다. 우리는 그렇게 조용히 멀어졌다. 관계란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이전 같지 않은 관계를 마주하며 씁쓸해하던 나에게 엘레나페란테의 소설 ‘나폴리 4부작’은 ‘사랑과 미움, 동경과 질투, 기대와 실망이 공존하는 복잡한 감정을 끌어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나아가는 것이 우정’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나폴리 4부작’은 1950년대 격동기에 이탈리아의 나폴리에서 자란 릴라와 레누, 두 여자의 60년 우정을 그린 소설이다. 1권 『나의 눈부신 친구』는 유년기, 2권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는 청년기, 3권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는 중년기, 4권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는 장년기와 노년기를 다룬다. 무려 2400페이지로 펼쳐지는 대하소설이지만, 술술 읽힌다.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우정이 가장 현실적으로 때론 직설적으로 그려져 있어서다. 때로는 릴라였고, 레누였던 시절을 떠올리며 읽었다. ‘맞아, 우리도 사실 그때 이런 마음이었겠지’하며 해묵은 감정을 다시 꺼내보게 되었다. 그동안 나를 옭아매던 알 수 없는 감정들로부터 해방감을 느꼈다.


릴라는 모든 면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친구이다. 타고난 재능으로 학교에서 항상 1등을 하고, 새로운 일도 거침없이 해내며, 제멋대로인 성격마저 매력적이다. 1권  『나의 눈부신 친구』는 소설의 화자 레누가 릴라의 그늘에서 그를 동경하는 동시에 열등감을 느끼며 성장하는 유년시절 이야기이다. 하지만 릴라는 집안 형편 탓에 중학교 진학을 포기한 채 돈 많은 집안의 청년과 결혼해 가업(구두점)을 이어간다. 한편, 레누는 공부를 계속해서 상급학교에 진학하면서 그들의 상황은 반전된다. 2권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는 한층 더 복잡해진 관계 속에서 ‘아내', ‘엄마', ‘대학생'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생기는 그들의 청년기 이야기이다. 이제 2권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나도 많은 부분 공감하며 읽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채 가시 돋친 말로 상처를 주고, 상대의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을 조롱하는 실수를 저지르며 분노, 증오와 같은 감정을 느낀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추악함을 느끼는 자신과 사투를 벌이는 모습이 현실 속 우정의 모습과 꼭 닮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너는 공부를 계속하도록 해.
넌 내 눈부신 친구잖아.
너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해.

1권에서 릴라의 결혼을 앞두고, 두 사람이 나눈 대화이다. 릴라를 동경해온 레누가 했을 법한 이 대사는, 릴라가 레누에게 한  말이다. 타고난 재능으로 1등을 놓치지 않았던 릴라는 그토록 하고 싶었던 공부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레누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이후 릴라의 결혼생활은 생각처럼 행복하지 않았다. 반면, 레누는 점점 주변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지식인으로 성장해나간다. 상황이 달라지자 릴라는 레누에게 독설을 날리고, 레누의 빛나는 순간을 노골적으로 깍아내렸지만, 결혼식 전날 릴라가 보낸 저 응원만큼은 진심이었다.



지금은 멀어진 우리도,  시절 누구보다 서로를 진심으로 응원했다. 치열한 입시 경쟁을 치르던 학창 시절, 당시에는  감정의 실체를 인정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서로 가지지 못한 부분을 시기하고 질투했다.  눈에 눈부시게 빛나던 친구를 부러워했던 마음이 사실  시절 우리를 크게 성장시킨 힘이었다. 한편, 출산을 앞둔 나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와 상태를 물어봐주고, 필요한 물건을 보내준 이들은 앞서 출산과 육아를 경험해  친구들이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멀어졌지만 우리는 이렇게 다시 가까워졌다. 그리고 또다시 멀어졌다. 이제 나에게는 개인적인 우정과 취미보다는 아이의 케어와 가족의 안위가 최우선 순위이기 때문이다. 이제 중년기에 접어들면, 3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에서 레누와 릴라처럼 우리 사이에는   간극이 생길 것이다. 이전과는 다른 성격의 사회적 역할을 해나가며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역사의 일부로서 갈등에 휘말리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제는 안다. 아이가 자라서  ! 하고 부모와 거리두고 독립하는 날이 오면, 그동안 멀어졌던 친구들과 다시 만나서 ‘그때 너의 빛나는 이런 면이 사실  부러웠다' 그리고 ‘그동안 많이 그리웠다' 이야기하는 날이 오리라는 것을. 혹은 우리의 관계가 결국 4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처럼 되더라도(스포방지),  시절 너는 나의, 나는 너의 눈부신 친구였다는 사실은 평생토록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 사실을 릴라와 레누의 60년 우정사를 통해 확인하고 나니, 이제서야 그동안 마음을 어지럽히던 관계의 변화가 편안하게 받아들여진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아기를 봐주시고 계신 시어머니께 물었다. “어머님, 60여년 살아보니 우정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세요?” 어머님은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하셨다. “내가 오래 살아보니, 우정은 ‘또 다른 나'인 것 같아. 그 친구가 잘 되고 행복해야 나도 행복하더라고." 연륜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엘레나 페란테 / 한길사  / 456p
1권 나의 눈부신 친구/2권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3권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 4권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 이 글은 2022년 5월 29일 #유어바이브(한국일보가 창간한 2535 MZ세대를 위한 뉴스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s://yourvibes.co.kr/?p=22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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