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근정 Aug 31. 2022

엄마의 갓생

엄마들의 독서모임

12권의 책, 12번의 모임, 20시간의 이야기, 100시간의 추억. 

작년 이맘 때 시작했던 ‘엄마들의 랜선 독서모임'이 1주년을 맞이했다.


만삭의 몸으로 마지막달까지 출근했던 나는 출산휴직과 함께 본격적으로 ‘엄마들의 독서모임’을 시작했다. 이전에는 사회인 독서모임을 약 5년간 참여했던 경험이 있다. 대학 동문회 내의 소모임이라 비슷하면서도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또래 여성들과 공감대가 쉽게 생겼다. 같은 텍스트를 읽어도 개인의 컨텍스트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고, 이해관계 없이 순수한 목적으로 만난 무해한 사람들과 진솔하게 생각을 나누는 일이 무척 즐거웠다. 한 달에 한두 번씩 모임을 가졌는데, 몸은 피곤해도 정신은 어쩐지 더욱 맑아졌다. 집과 회사만 오가던 나의 단조로운 일상이 독서모임 덕분에 다채로워졌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코로나가 닥치고, 이 시기에 결혼과 출산을 잇달아 경험하면서 사회인 독서모임에 더이상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위기와 기회는 함께 왔다.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으로 대면모임이 어려워지자, 온라인 모임이 본격화되었다. 선배엄마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던 만삭의 초보엄마는 휴직을 시작하면서 (예비)엄마가 중심이 되는 ‘엄마들의 독서모임'을 온라인으로 시작했다. 출퇴근이 일정하지 않은 돌봄 노동을 하는 전업주부나 직장에 다니는 워킹맘은 따로 시간을 내서 외출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 엄마들에게 랜선 모임은 이동시간을 줄여주었고 무엇보다 아이들과 함께 참여 가능하다는 점에서 유용했다. 서울, 광주, 대전, 강원도, 경기도에 거주하는 엄마 5명이 모였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대학을 다녔을 뿐,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들이지만 ‘엄마'라는 이름 하나로 빠르게 동질감이 생겼다. 우리는 출산 전날에도 조리원에서도 독서모임을 이어갔다.


출산 전에는 이적 어머니로 유명한 박혜란 작가님의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가수이자 변호사인 이소은 아버지로 유명한 이규천 교수님의 『나는 천천히 아빠가 되었다』와 같은 책을 읽으며 가치관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어떤 부모가 되고 싶은지, 교육에 대한 철학은 어떠한지를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대답해보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며 나의 생각을 다듬어 갔다. 그런데 출산을 하고 나자 밤낮없이 우는 아이를 달래는 일이 급선무였다. 김은희 작가님의 『하루 10분 퀄리티타임 육아법』과 신의진 교수님의 『아이심리백과』와 같은 육아 실용서를 함께 읽으며 실전 지혜를 나누었다. 최근에는 육아서뿐만 아니라 인문학까지 범주를 넓혀 타라 웨스트오버의 『배움의 발견』, 최재천 교수의 『최재천의 공부』와 같은 책을 함께 읽었다. 부모이기 이전에 개인의 삶을 돌아보는 배움과 공부의 시간이었다. 아이가 울면 어찌할 줄을 몰라 함께 울던 초보엄마는 책과 랜선 독서모임을 통해 인생 선배들과 끈임없이 대화를 나누며 아이와 함께 성장했다.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은 책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에서 에밀 뒤르켐은 ‘다양한 커뮤니티의 인적 자본’을 소유하는 것이 앞으로 더 중요해 질 것이라고 말한다. 한 조직에서만 쌓은 인적, 기술적 사회 자본은 대부분 그 조직을 벗어나면 크게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가능한 젊을 때 여러 조직과 커뮤니티를 경험하면서 인적 자본과 사회 자본을 한 장소가 아닌 분리된 여러 장소에 만들라고 조언한다. 하나의 조직과 커뮤니티는 취약하더라도, 여러 커뮤니티를 보유한 사람의 자본은 위기에 더욱 빛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 한다. 만약 속해있던 조직과 커뮤니티가 없어지더라도 그 안의 사람들 사이에 신뢰가 형성되어있다면, 그 사람의 사회적 자본은 줄어들거나 사라지지 않고 아메바형으로 다른 커뮤니티에서 분산되어 무제한으로 복제 확장될테니 말이다.


코로나와 함께 임신, 출산, 육아를 경험하며 더욱 고립되기 쉬운 엄마들에게 랜선 독서모임은 한 줄기 빛이었다. 만삭으로 거동이 불편해도, 산후조리 중에도, 어린이집 내 확진자 발생으로 긴급 가정보육 중에도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서 온라인으로 만났다. 나의 경우, 출산 직후 불현듯 우울함이 밀려올 때 책과 책모임이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누군가는 천국이라 부르는 조리원 생활이지만 코로나로 인해 남편 출입도 어려웠던 터라 나는 마치 감옥에 갇힌 것 처럼 답답했다. 누워서 sns 속 타인의 삶을 보는 일은 나를 더 우울하게 만들 뿐이었다. 한없이 무기력해졌던 내가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게 해준 것은 책이었다. 글자를 읽는 것도 힘에 부쳐서 박완서 소설 『나의 아름다운 이웃』을 오디오북으로 들었다.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마치 나의 지인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친근했고, 그들의 발랄한 생각과 일상이 나를 웃게해 주었다. 한 달에 한 번 온라인으로 만나는 독서모임 멤버들은 내게 대부분의 산모가 우울감을 겪는다며 공감해주고, 따뜻하게 위로를 건네주었다. 엄마라는 새로운 정체성에 적응하는 중에 혼란스러울 때 독서모임 멤버라는 사회적 자아가 있어서 공허함이 덜했고, 아이를 재운 뒤 책을 읽는 시간은 온종일 육아에 지친 영혼을 달래주었다. 비슷한 시기에 출산과 육아를 경험하며 연대감을 느끼는 사람들과 랜선을 통해 느슨하게 연결되어있는 커뮤니티가 나를 혼란에 잠식되지 않도록 틈틈이 들여다 봐주었다.


자본의 힘이 무서운 것은 ‘확장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지난 1년간 책을 통해 만들어온 ‘인적 자본’은 앞으로 에밀 뒤르켐의 말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무한히 확장 될 것이다. 엄마들뿐만 아니라 분유를 먹으며 낮잠을 자며 함께 했던 아이들에게도 나중에 ‘독서 커뮤니티의 인적 자본'을 선물하고 싶다. 아마 너무 어려서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이렇게 글과 사진으로 남아있는 기록이 아이들 마음 속에 씨앗이 되어 언젠가 고유하게 꽃 피리라 믿는다.


누군가 ‘독서모임이 도대체 왜 해?’라고 묻는다면, 이제 이렇게 이야기 한다. “부자 되려고.” 나는 인적 자본이 풍부한 사람이다. 정답이 없는 삶에서 길을 잃었을 때 지혜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을 책을 통해 언제든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실천하고 있다.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하는 것이 큰 차이를 만든다. 갓생사는 엄마에게 살림과 육아만이 전부가 아니다. 무한히 확장되는 인적 자본을 키우는 일, 책을 통해 내가 축적하고 있는 소중한 자본이다.


야마구치 슈(김윤경 옮김)/다산초당/2019/336p


이전 04화 이제는 멀어진 나의 눈부신 친구들에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