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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op으로 한국어를 공부하듯이

이탈리아어 공부

by 바다의별

오랜 시간 해외여행을 나갔다가 현지 음식에 질릴 때쯤 우리는 한식을 찾는다. 하지만 모든 나라에서 한식을 먹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는 그럴 때 이탈리안 음식, 특히 토마토소스 기반 음식을 먹으면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속이 풀어진다. 그저 좋아하는 음식들이라 그런 것이려나 했지만, 이젠 내가 전생에 정말 이탈리아와 관련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탈리아어까지도 공부하고 있으니 말이다.


영어는 당연했고, 프랑스어는 강제였다. 일본어와 중국어는 남들이 하니까였고, 스페인어는 그냥 멋있어 보여서였다. 내가 공부할 외국어들을 선택했던 이유는 대개 그런 것들이었다. 굳이 이유를 대보라고 하면 말할 수는 있지만 딱히 이야깃거리는 되지 않을, 뻔하고 막연한 것들.


하지만 이탈리아어는 내가 못 견디겠어서 선택한 최초의 언어다. 인생 처음으로, 너무나도 이해하고 싶은 언어가 생겼다. 그 이유는 나를 뮤지컬에 빠지게 만든 것과 동일했다. 바로 팬텀싱어. 이탈리아 가곡을 수시로 부르는 프로그램이다 보니 이탈리아어로 된 노래들이 하나둘 익숙해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이탈리아어를 보고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수도 없이 들은 좋아하는 곡들의 경우 따라 부를 수도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뜻을 모를 뿐. 물론, 가사의 내용이야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바로 나오는 것이지만, 한 줄 한 줄 알지 못하면 그것 또한 금세 잊어버리게 된다.


그러니 자연히, 내가 매일 같이 듣고 흥얼거리는 노래들이 어떤 걸 이야기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졌다. 멜로디와 발음을 넘어, 그 속에 담긴 의미까지 이해하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새로운 외국어를 하나 공부하기 시작했다. K-Pop을 듣다가 결국 한국어까지 공부하게 되는 외국인들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게 된 것이다. 모르는 언어로 된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는 자막을 함께 보면 대사들이 바로바로 이해가 되는데, 노래를 그런 방식으로 듣기는 쉽지 않다. 결국 노래를 들으며 가사에 집중할 수 있으려면 그 언어를 직접 이해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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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어 어휘들이나 표현들이 이미 내가 공부하고 있는 프랑스어와 비슷해 헷갈리지는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나의 프랑스어 실력이 크게 향상될 날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막연하게 기다리는 건 안 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게 느껴졌다. 그래서 결국, 중단할 때 하더라도 일단 시작해 보자는 마음으로 교재를 구입했다.


아무래도 라틴어 계열 언어는 프랑스어도 공부해 보았고 스페인어도 공부해 봤으니, 이탈리아어를 시작하는 데에 거부감이 좀 덜했던 것도 같다. 실제로 프랑스에서 교환학생을 하던 때, 스페인 친구와 이탈리아 친구가 각자 나라 말을 하면서도 70% 정도의 대화가 되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봤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비록 스페인어를 거의 다 까먹었을지라도 한 번 공부해 본 것과 비슷하다면 아주 어렵지는 않겠거니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나의 생각, 나의 바람일 뿐, 이탈리아어는 이탈리아어만의 특징이 있었다. 남성 명사와 여성 명사가 구분 지어지는 것이나 기본적인 문법 체계는 어느 정도 비슷해 보였지만, 생각 외로 독특한 규칙들이 있었다. (독특하다는 것 역시 지극히 나의 기준이지만.)


가장 놀라웠던 것은 복수형을 만드는 방식이었다.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모두 명사의 복수형을 만들 때는 대개 어휘 뒤에 무언가가 추가로 붙는 형태이다. 기본적으로 '-s'가 붙으며, 언어에 따라 경우에 따라 일부 예외적인 변형은 있지만 기본적인 규칙은 그랬다. 하지만 이탈리아어에서는 어휘의 뒷부분이 아예 바뀌어버린다. 예를 들어 남자 아이를 뜻하는 단어인 ragazzo는 복수형 ragazzi가 되고, 여자 아이를 뜻하는 ragazza는 ragazze가 되는 방식이다. 그런 형태의 복수형이 라틴어에 가장 가까운 거라고는 하지만,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왜 굳이 이렇게 복잡하게 쓰는 건가 싶다가도, 나 역시 한국어를 떠올리면 또 할 말이 없어진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말을 배울 때도 얼마나 많은 난관에 부딪칠까. 한국어를 외국인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한국어교원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할 때도, 이걸 지구 반대편에서 온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막막하곤 했다. 먼 나라의 새로운 언어, 새로운 문화를 익히고자 한다면 어쩔 수 없이 더 크게 느껴질 어려움들이리라.


그러나 K-Pop을 이해하고 싶어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한 사람들이라면, 적어도 학교 교과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공부하게 된 사람들보다는 그런 난관에 쉽게 주저앉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나 역시 그러니까.


복잡한 복수형에도, 수많은 불규칙동사에도, 이탈리아어를 그만두고 싶은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프랑스어는 수도 없이 그런 순간들이 왔었다. 남성 명사와 여성 명사의 구분, 반과거, 복합과거 등 영어에서는 본 적 없는 새로운 문법체계들을 배우게 될 때마다 그만두고 싶어졌다. 게다가 프랑스 콘텐츠들이 내 취향과 잘 맞지도 않아서, 재밌게 반복해서 볼 만한 영화나 드라마도 없었다. 어쩌다 보니 지금까지 계속 공부를 이어오고는 있지만, 초반에는 학교만 아니었다면 당장 그만두었을 순간들이 항상 있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어는 ‘생각보다 어렵네’, ‘쉽지 않네’ 등의 생각은 들어도, 목표가 있으니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어렵지만 재미있다. 아직은 더 알고 싶은 것들이 있고, 더 이해해야 할 것들이 남았으므로.


어렵게 느껴질 때마다 나는 노래를 듣는다. 좋아하는 노래들의 가사를 인터넷에서 찾아두고는 새로운 단어를 익힐 때마다 그 아래에 해석을 달아보고 있다. 하나의 단어를 배우면, 몇 개의 노래에 적용해 볼 수 있었다. 이렇게 공부하니 재미도 있고 실질적으로 내가 목표했던 것을 이루는 느낌이라 성취감도 든다. 막연한 의미를 알고 그냥 들을 때와, 어휘를 이해하면서 들을 때와는 그 느낌이 전혀 달랐다. 역시 공부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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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h la vita

아, 인생이여

Più bello della vita non c'è niente

이 삶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네

- Elio Gandolfi, 'La Vita' 중


오래전 멋모르고 이탈리아 여행을 했을 때 보았던 풍경들을 떠올리며, 그곳에 다시 갈 때에는 이탈리아어로 길을 묻고 음식을 주문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며, 좋아하는 언어를 직접 말하게 될 그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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