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문장을 이해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아마 공연을 꽤 자주 보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공연을 자주 보는 소위 ‘연뮤덕’ (연극, 뮤지컬을 좋아하는 덕후)들이 사용하는 은어들이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의 프롤로그에서부터 취미생활이란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는 것 같다고 적어두었지만, 뮤지컬은 특히나 더 딴 세상 같았다. 취미로 삼기에는 비싸고 시간 내기 어려워 보였고, ‘보는 사람만 보는’ 특수한 무언가 같았다. 나 역시 어쩌다 한 번씩 유명 작품을 볼 기회가 생기면 즐겁게 보고 오고는 했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그러나 요즘의 나는 뮤지컬을 보기 위해 돈을 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회사에서 퇴사욕구가 올라올 때마다 미리 예매해 둔 다음 달 그리고 다다음달 티켓들을 떠올리며 참는다. 뮤지컬 티켓팅이 대부분 두세 달 전에 진행된다는 점이 때로는 이런 장점이 있다.
뮤지컬에 빠지게 된 첫 계기는 팬텀싱어 시리즈였다. 남성 4중창 팀을 만들어내는 오디션 프로그램인 팬텀싱어는 참가자들 대부분이 성악가 아니면 뮤지컬 배우다. 방송을 계속 보다 보니 웅장한 발성과 공명에 빠져버려 어느 순간부터 일반 가요보다 성악곡이나 뮤지컬 넘버들을 더 자주 듣게 되었다. 사실 팬텀싱어가 내게 준 새로운 취미는 이게 전부가 아니었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나중에 또 적어보겠다.
아무튼, 거기서 유난히 눈에 띄는 뮤지컬 배우가 있었다. 그의 목소리와 표현력이 너무도 와닿아 들을 때마다 빠져들었다. 그럼에도 내 관심이 곧장 뮤지컬까지 확장되지는 않았다. 아마 그 정도로 뮤지컬은 멀리 느껴졌던 것 같다. 그냥 그가 부르는 노래들이 좋았고, ‘언젠가 한 번쯤 뮤지컬도 보면 좋겠지’ 정도로만 생각했다.
시간이 흐른 뒤 어느 날, 프랑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오리지널 팀의 내한공연 소식을 듣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 학교에서 공연 영상을 본 적이 있고 한국 캐스트의 공연을 본 적도 있지만, 오리지널 팀의 공연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당시 아는 뮤지컬 작품이 몇 없던 내게는 최고의 뮤지컬 중 하나였기에, 문화생활이나 하자 싶어서 몇 년 만에 공연 예매사이트에 들어갔다. 운 좋게도 아직 자리가 남아있어 예매한 후 창을 닫으려는데, 팬텀싱어에서 눈에 띄었던 그 배우가 출연하는 뮤지컬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언젠가 한 번쯤’이 지금 왔다는 걸 깨달았다. 마침 <노트르담 드 파리>를 보려고 했던 바로 그날, 그 배우가 출연하는 회차가 있었다. 나는 방금 예약한 건을 단숨에 취소하고, 그 뮤지컬로 새로 예약했다. 그렇게 쉽게 계획을 바꿨던 건 정말이지 좋은 선택이었다. 뮤지컬은 기대 이상으로 너무나도 재밌었고, 그 배우의 목소리 역시 실제로 들으니 더 좋았다.
그전에도 뮤지컬들을 보기는 했지만, 그 작품이 특별했던 건이전과는 달리 막연한 마음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보고 싶은 배우가 있었고, 그러다 보니 사전에 그 뮤지컬에 대한 후기도 찾아보게 되고 스토리와 구성에 대해서도 정보를 더 찾아보게 되었다. 아주 조금의 관심만 더 가져도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뮤지컬을 한 편 봤다고 해서 내가 순식간에 ‘뮤덕’이 되지는 않았다. 한 번의 이벤트가 그렇게 쉽게 일상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서서히그리고 꾸준히 스며들다 보면 점점 가속도가 붙는 것 같다. 나는 그렇게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게 뮤지컬에 빠져들었다.
뮤지컬에는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이 담겨있다. 콘서트처럼 좋은 노래들을 실컷 들을 수 있고, 따스하거나 유쾌하거나 애절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누군가의 열정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으니까. 2시간가량의 작품이 만들어지는 동시에 사라지는 걸 보는 건 경이로운 일이었다. 오늘 한 여정을 내일 또 하고, 모레도 또 반복한다고 생각하면 늘 배우들도 스텝들도 존경스럽다. 그렇게 좋아하는 배우가 늘었고, 보고 싶은 작품이 늘었다.
처음에는 같은 작품을 수도 없이 반복해서 보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이제는 내가 그러고 있다. 영화는 극장에서 상영하고 얼마 후면 OTT 플랫폼에 올라온다. 그러면 똑같은 작품을 몇 번이고 다시 볼 수 있다. 하지만 뮤지컬은 늘 현재, 지금 이 순간의 예술이다. 같은 배우로 같은 공연을 다시 봐도 결코 똑같지 않다. 배우의 컨디션, 그날만 있었던 애드리브, 그날만 갑작스레 생긴 사고 같은 것들에 따라 공연은 완전히 달라지기도 한다.
예를 들면 오래전 프랑스에서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한 배우가 마이크가 고장 나는 바람에 노래 중간에 마이크 없이 엄청난 성량을 내질러 오히려 더 좋았던 기억이 있고, 최근 우리나라에서 초연 중인 <멤피스>에서도 소품이 넘어져 주연 배우가 너무도 능청스럽게 정리해 주는 모습에 감탄했던 적도 있다. 창작 뮤지컬 <곤 투모로우>에서도 한 배우의 애드리브가 그 장면을 더 빛나게 해주는 모습을 보며 감동받기도 했다. 그날 그 공연을 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다.
한 번 시작된 공연은 대개 1~3개월씩 지속되기 때문에 다시 볼 기회가 몇 차례 주어지기는 하지만, 그 공연 기간이 지나고 나면 기약이 없다. 이후에도 몇 번씩 다시 올라오는 작품들도 많이 있지만 대사와 내용이 수정되기도 하고, 넘버 (뮤지컬에 등장하는 노래)가 바뀌기도 하며, 무엇보다 배우들이 동일하게 캐스팅될 가능성은 많지 않으니까. (물론 뮤지컬 <맘마미아> 도나 역의 최정원 배우와 <영웅> 안중근 역의 정성화 배우는 초연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주연으로 돌아오기는 한다!)
그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순간을 영상으로 남겨주는 고마운 제작사들도 있다. 좋아하는 배우의 좋아하는 넘버가 유튜브에 올라올 때면 정말이지 마르고 닳도록 본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듣는 걸 대신할 수는 없다.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음압, 직접 목격하는 짜릿함.좋은 작품은 봐도 봐도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리기에 반복해서 공연을 보러 가게 된다.
“이렇게 재밌는 걸, 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뮤지컬을 즐겨보기 시작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학생 때 대학로 근처에 살았는데, 그때는 지금보다 더 쉽게 공연을 접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때는 즐기지 못하고 이제야 보기 시작했나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런 아쉬움이 들 때면 뮤지컬 역시 순간의 예술임을 기억하려고 한다. 그때 뮤지컬을 즐겼더라도 그때의 뮤지컬과 지금의 뮤지컬은 다를 거라고. 지금, 뮤지컬을 즐길 타이밍이 왔다는 사실만으로 반가워하자고.
이제야 알게 된 만큼 더 열심히 즐기면 된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언젠가는 지금처럼 즐기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수도권에 살지 않게 되거나, 날이 갈수록 솟는 티켓 가격이 너무 부담스러워지거나, 공연 볼 시간을 내기 어렵거나 할 수도 있으니까. 모든 취미 생활이 그렇듯, 이것 또한 타이밍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즐길 수 있을 때 열심히 즐기자.이 순간이 지나면 사라질 순간의 예술을.
* ‘오늘 본진의 공연 총첫이자 자첫이었는데 회전문 돌 것 같다.’ 뜻 :
‘오늘 좋아하는 배우가 하는 공연의 전체 첫 공연을 보았는데, 앞으로도 몇 번 더 볼 것 같다'
- 본진 : 가장 좋아하는 배우
- 총첫 : 해당 공연의 맨 처음 회차 공연 (보통 한 배역에 여러 배우가 함께 캐스팅되기 때문에, 공연의 전체 첫 공연과 특정 배우의 첫 공연 등이 구분된다. 총첫은 공연 전체 통틀어서 가장 처음 진행되는 회차를 의미한다.)
- 자첫 : 내가 그 공연을 처음 보러 갔을 때 쓰는 말. 재관람할 경우에는 자둘 (두 번째 볼 때), 자셋 (세 번째 볼 때) 등으로 표현한다.
- 회전문 돈다 : 공연이 좋아서 여러 번 볼 경우, 헤어 나오지 못하고 계속 도돌이표처럼 다시 보는 걸 의미한다.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회전문 장면이 생각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