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소 혼자 잘 논다. 밖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하지만 집에 혼자 있어도 전혀 심심함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정말 혼자 노는 것이 아니라 그저 수많은 디지털 플랫폼에 의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유튜브 추천 영상,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인스타그램 피드, 단순하고 반복적인 모바일 게임, 이미 여러 차례 본 넷플릭스 시리즈. 퇴근 후 혹은 주말에 그렇게 무의미한 몇 시간이 흐르고 나면, 쉬기는 쉬었는데 쉰 기억이 없다. 그래서 밤에 잠이 들 때면 하루가 너무 아까워진다.
그럴 때 나는 잠시라도 강제 중단해 본다. 습관처럼 틀어놓는 화면들을.
취미라기엔 다소 애매할지도 모르지만, 습관이라기엔 정기적이지도 않다. 그냥 가끔씩 디지털을 기반으로 한 취미들이 독주할 때, 이를 저지하기 위해 내가 의도적으로 주말을 나는 방법이다.
1. 글쓰기와 함께 인터넷 디톡스부터 시작
먼저 집의 인터넷 전원을 끄고 휴대폰의 모바일 데이터도 꺼버린다. 급한 일이 있다면 메신저 대신 전화가 올 테니 신경 쓰지 않는다.
오전에는 일단 글을 쓴다. 아무래도 글은 손으로 쓰지 않고 노트북으로 쓰기 때문에, 전자기기를 완전히 쓰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도 인터넷은 끊었으니, 글을 쓰다 딴 길로 새는 일은 방지할 수 있다. 가사가 없는 클래식 음악과 뉴에이지 음악을 틀어놓고 글을 쓴다. 아무것도 유혹하는 것이 없으니 글쓰기에 더 쉽게 집중할 수 있다. 글을 쓰다 궁금해진 것들은 작은 메모지에 나중에 검색할 목록을 적어놓는다.
2. 책 읽으며 점심식사
평소 같으면 혼자 식사할 때 가벼운 영상을 틀어둘 텐데, 인터넷이 안 되니 오로지 음식과 나뿐이다.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식사를 하다 보면, 아무래도 영상을 보던 습관 때문인지 그 짧은 시간마저 심심해진다. 결국 방에서 얇은 책을 한 권 들고 나온다. 가벼운 책이거나, 이미 재밌게 읽어서 한 번 더 읽어보리라 다짐했던 책이다. 끝내 식사 그 자체에만 집중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동영상을 볼 때보다는 차분한 식사다. 동영상을 볼 때는 동영상의 박자에 맞춰 밥을 먹어야 했다면, 책을 볼 때는 내가 먹는 박자에 맞춰 책장을 넘기면 되니까. 왠지 소화도 더 잘 되는 느낌이 든다.
3. 음악을 들으며 설거지
식사를 하면서 동영상을 보면 설거지를 할 때까지 이어서 보게 된다. 그리고 보통은 설거지를 끝내고 나서 까지도 시청이 이어진다. 그렇게 오후 시간이 다 가버리곤 한다.
설거지를 하는 일이 그다지 즐거운 일은 아니기 때문에 그나마 즐거울 수 있는 동영상이라도 보고자 하는 것이지만, 영상을 보면서 하면 설거지 속도가 느려져 자연스레 더 오래 하게 된다. 동영상을 끄면 음악만으로도 즐거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동영상을 볼 때보다 설거지를 더 빨리 끝낼 수 있으니 그것 또한 좋다.
4. 독서와 함께 본격적인 디지털 디톡스 시작
인터넷 디톡스에 어느 정도 적응하면, 노트북도 모두 끄고 완전한 디지털 디톡스에 돌입할 차례다. 갑작스러운 적막함에 적응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책 속에 빠져드는 것이다. 읽기 시작한 지는 오래되었으나 졸리다는 이유로 혹은 집중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아직도 끝내지 못한 책을 들고 소파에 앉는다. 집중하기 어려웠던 건 어쩌면 환경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집중을 방해할 요소들이 없으니 순식간에 책 속 세상에 스며들 수 있다. 간혹 너무 적막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창문을 살짝 열어 먼발치의 소음을 들어본다.
5. 고요한 산책
산책을 할 때는 원래 화면을 보지는 않지만, 늘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는다. 눈은 열려있고 귀만 음악을 들을 뿐이지만, 이어폰을 완전히 빼고 하는 산책은 그동안의 산책이 반쪽짜리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발걸음 소리, 자전거 소리, 바람소리, 물소리가 확실하게 들리면서 주변 환경에 조금 더 관심이 생긴다.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그 계절의 꽃잎들, 하늘 위로 지나가는 비행기, 떨어지는 나뭇잎들이 평소보다 눈에 더 잘 들어온다.
6. 사각사각 요리
저녁을 만들기 위해 채소를 썬다.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집 안에 퍼진다. 당연하겠지만 양파, 당근, 버섯, 채소마다 썰리는 소리가 크기도 깊이도 다르다. 잠시나마 드라마 <무빙>의 미현이나 봉석이가 된 것 같다. 물을 끓이는 소리도, 채소가 볶아지는 소리도 이토록 다채로움을 새삼 느낀다. 산책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인공적인 소리가 사라지니 다른 소리들에 예민해지고, 덩달아 촉각과 후각도 예민해지는 모양이다. 가장 자극적인 것들을 꺼버리고 나니 온몸의 감각들이 깨어나는 듯하다.
7. 놀 거리 찾기
개운한 상태로 방에 들어서면 평소와 느낌이 다르다. 평소의 동선과 다르게 들여다보게 된다.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것들이 좀 더 눈에 들어온다. 어릴 적 사진들과 편지들이 담겨있는 추억상자, 작년에 설레는 마음으로 보았던 공연 티켓, 어린 시절 좋아해서 여러 번 읽었던 책. 다 소중해서 모아둔 것들인데 들춰볼 일이 잘 없다. 그렇게 발견된 추억 속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른다.
8. 숙면, 그리고
침대에 누워 일기를 쓴 뒤, 책을 읽다 잠에 든다. 영상과 음성의 재미가 사라지니 글자의 재미를 찾게 된다. 다음날 알람을 맞추기 위해 휴대폰을 손에 들면 잠시 유혹에 흔들리지만, 그래도 그쯤 되면 어느 정도 적응이 된 상태라 그런지 잘 떨쳐낸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자고 일어나면 평소보다 개운하다. 특별히 더 오래 자는 것도 아닌데, 깊이 잘 잔 것 같은 기분이다. 다음날도 디지털 기기 없이 하루를 시작한다.
가끔 이렇게 디지털 디톡스 또는 인터넷 디톡스를 할 때면, 화면으로 시작해 화면으로 끝나던 나의 하루가 좀 더 다양한 활동들로 채워진다. 생각보다 카카오톡으로 중요한 연락이 오는 경우는 많이 없고, 궁금한 것을 조금 참아야 한다는 것만 빼면 불편한 점도 거의 없다.
평일에는 직장생활을 하기 때문에 디지털 디톡스를 이어가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디톡스를 한 주말 뒤에는 한 동안 화면을 보는 시간이 줄어든다. 무의미하게 텔레비전이나 동영상을 켜놓지 않고, 소리가 필요하면 가사 없는 재즈 음악이나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는다. 그러면 소리 속에서도 방해받지 않고 글을 쓰거나 책을 읽거나 요리를 할 수 있다. 밤에도 유튜브 영상을 보는 대신,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일기를 쓰다 잠이 든다.
몇 년 전 아프리카에서 5주 간 캠핑을 할 때의 변화가 떠오른다. 초반에는 와이파이가 안 되는 캠핑장에 가면 다들 실망하고 답답해했지만, 나중에는 와이파이가 되는 캠핑장에 가더라도 필수적인 연락만 하고 다른 것들에 집중하며 시간을 보냈다. 캠핑장 근처 동네 탐방을 한다거나, 수영장에서 논다거나, 책을 읽는다거나, 캠프파이어 주위에서 게임을 한다거나. 인터넷이 물과 공기와 같은 존재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인터넷 없는 환경에서 더 다양한 재미를 찾게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