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에게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만큼 힘겨운 일이 또 있다면, 그건 통근길일 것이다. 회사가 멀면더 일찍 일어나야 하고 대중교통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도 더 길어져서, 회사에 도착하기도 전에 지친다. 몸까지 아픈 날이면 최악이다. 아프다고 매번 휴가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대부분의 경우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일단은 일어나 문밖으로 나간다.
경기도에서 서울로 출퇴근을 한지 이제 딱 6년이 된 것 같다. 버스를 타던 때도 잠시 있었지만 대부분은 지하철로 다니고 있다. 요즘 광역버스들은 대부분 안전상의 이유로 좌석이 없으면 서서 가지 못하지만, 지하철은 발 디딜 틈이 없어도 어떻게든 탈 수 있다. 그래서 지하철 안에서는 자리쟁탈전이 더욱더 예민하게 벌어지고는 한다.
그래도, 그 안에서도 규칙이 있다. 노약자석은 노약자가 아니면 앉지 말 것, 임산부석은 임산부가 아니면 앉지 말 것. 그리고 일반석에 자리가 나면 그 자리에서 가장 가까이 서 있던 사람이 먼저 앉을 수 있도록 잠깐이라도 기다려볼 것.
그날 아침에도 자리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몸이 좋지 않은 날이라 어떻게든 앉고 싶었지만, 그날따라 내가 서 있는 곳 근처에서는 빈자리가 생기지 않았다. 나는 지하철 문 바로 옆, 맨 끝 자리 앞에 서 있었다. 아플 때는 끝 자리에 있는 기둥을 잡고 서 있으면 조금 덜 힘들다.
당시 지하철은 가득 찬 정도는 아니라서, 그래도 나름 쾌적한 편에 속했다. 띄엄띄엄 사람들이 조금씩 서 있는 정도로, 내 옆에는 두세 자리 정도의 거리를 두고 한 커플이 서 있었다. 이른 아침 출근길의 지하철은 대체로 고요한데, 자꾸만 큰 소리로 웃고 떠들어서 그 소리가 더 크게 들리던 두 사람이었다. 나는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손에 든 책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얼마 후, 드디어 내 바로 앞에 앉아있던 사람이 내릴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 차례다.'
나는 속으로 안심하며, 잡고 있던 기둥에서 손을 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손을 떼야, 그가 일어나서 옆문으로 내릴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내 앞사람이 내릴 시늉을 하기 시작한 때쯤, 멀리 떨어져 서 있던 커플 중 남자가 내 옆으로 성큼 다가왔다. 이 근처에는 내릴 기미가 보이는 사람이 더 없었는데, 그가 굳이 이쪽으로 옮겨 올 이유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 바로 그다음, 순식간에 일이 벌어졌다. 내 바로 앞에 앉아있던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기둥에서 손을 떼며 반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가 내 앞을 지나쳐 문으로 향한 바로 그 순간, 옆에 서 있던 남자는 갑자기 내 얼굴 앞으로 팔을 뻗어 나를 가로막고는 멀리 서 있던 여자를 끌어당겨 그 빈자리에 앉혔다. 나는 그저 앉아있던 사람이 내릴 수 있도록 잠시 기둥에서 손을 놓은 것이 전부였다. 남자는 그 틈을 타 나를 의도적으로 막아서고 자신의 여자친구 혹은 부인을 앉힌 것이다. 여자는 허겁지겁 자리로 달려와 앉고, 둘은 웃으면서 눈빛을 교환했다.
'무슨 이렇게 상도덕에 어긋나는 일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나는 너무나 황당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남자를 쳐다보자, 그는 고개를 반대로 돌려 내 시선을 피했다. 내 앞에 있는 여자를 내려다보자, 여자 역시 곧장 눈을 감더니 자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자리는 내 자리도 아니었다. 돈을 내고 산 것도 아니고, 그저 암묵적인 룰에 따라 내 자리가 될 차례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니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좌석을 내어주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나 역시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날, 그 두 사람의 태도는 내 기분을 상하게 했다.
근처 임산부석은 아까부터 비어있었으므로, 여자가 임산부는 아닐 것 같았다. 그냥 몸이 안 좋았던 걸 수도 있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크게 웃으면서 장난치던 것이 생각났다. 설령 정말 임산부라고 해도, 그날따라 몸이 정말 안 좋았다고 해도,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나를 치사하게 막아서는 대신, 아프다거나 다리가 불편하다는 등의 말 한마디라도 해주었다면 나 역시 당연히 양보해 주었을 텐데. 생각할수록 화가 나서, 손에 펼쳐든 책에 집중하지 못하고 손 끝 너머로 보이는 남자와 책 너머로 보이는 여자를 계속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날 화가 났던 일이 아니라, 그날 낭비된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 커플이 나를 가로막아 자리를 뺏고 나서 내가 하차하기까지의 시간, 약 20분. 어떻게 해야 내 자리를 사수할 수 있었을까, 혹은 되찾을 수 있었을까, 내내 고민하다, 어떻게든 저들을 곯려줄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까지 이르렀다.
그러는 동안 평소 나의 출근길 루틴은 망가졌다. 보통은 책을 읽는 그 시간, 나는 어떤 문장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같은 페이지를 몇 번씩이나 반복해서 훑다 그 커플을 힐끔거리기를 반복했다. 그 후 내려서 다른 지하철을 갈아타고 회사로 출근하기까지, 나는 수시로 그 순간을 머릿속으로 다시 재생했다.
하지만 나는 어차피 그들에게 화를 낼 생각이 없었다. 출근하러 가는 이른 아침에 그럴 힘도 없었고 매일 타야 하는 지하철에서 소란을 피울 마음도 없었다. 그러니 그냥 눈을 한 번 흘긴 뒤 내 일에 집중했어도 되었을 일이다. 아마 다시는 못 만날 그들에게 '사정이 있었겠지' 생각하며 넘어가면 되었을 일이다. 읽던 책에 조금만 더 몰입했거나, 차라리 자리를 옮겨 다른 칸으로 갔다면 금세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상황을 복기하는 건 목적 없는 행동이었다. 큰 일에는 정당하게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맞지만, 하루 중 20분을 못 앉았다는 이유로 이렇게나 오래 화가 나 있을 이유는 없었다. 결국 그 순간에 굳이 얽매여 화를 반복해서 느낀 건 그들이 아니라 내 탓이었다.
나는 자리만 뺏긴 것이 아니라 시간까지 빼앗겨버리고 만 것이다. 시간은 그 누구도 내게서 뺏어갈 수 없는 것인데.
적당히 감정을 버리고 다스리는 연습도 필요하다. 무례한 사람이 내 소중한 시간 20분을 뺏어가게 둘 것인가, 아니면 빠르게 마음을 안정시키고 계획했던 대로 20분을 보낼 것인가. 짧지만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었던 그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