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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Jun 12. 2024

배낭을 메고 4성급 호텔에 가는 것처럼

시애틀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기차 안에서

나는 이동수단 중에 기차를 가장 좋아한다. 비행기보다 덜 번거롭고 버스보다 시간이 정확한 편 것도 마음에 들지만, 큰 창문을 통해 바깥 풍경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 낭만적이기 때문이다. 대개 기차에서는 빌딩숲의 방해를 받지 않고 창밖 풍경을 즐길 수 있다. 만약 우리나라가 분단국가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진작 기차를 타고 유럽까지 가봤을 것이다.


그런 내가 미국에서 꼭 타보고 싶었던 기차가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알래스카 철도, 다른 하나는 미국 서부의 코스트 스타라이트 (Coast Starlight). 알래스카 철도는 내가 방문했을 당시 겨울이라 앵커리지에서 페어뱅크스 구간만을 운행하고 있었고, 모든 좌석은 동일한 등급이었다. 그런데 코스트 스타라이트는 달랐다.


내가 타고자 했던 시애틀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의 구간은 22시간 30분. 앉아서 쪽잠을 잘 것인가, 누워서 창밖 하늘을 바라보며 잠을 잘 것인가, 둘 중에 택해야 했다. 일반석은 내내 앉아서 가는 좌석이었고, 간이침대칸은 일행마다 분리된 칸 안에 일반석보다 편안한 좌석이 제공되는 데다 밤이 되면 그 좌석을 간이침대로 바꿀 수 있었다. 침대칸을 예약하면 편하게 밤을 보낼 수도 있는 동시에 식사 3끼를 메뉴에 상관없이 무료로 제공받을 수 있었다. 여러모로 낭만적인 선택이기는 했지만, 당연히 그만큼 비용이 많이 커졌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2인석인 침대칸을 혼자 사용하면 추가 비용도 붙었기에 더욱 고민이 되었다. 누군가가 언젠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잠시 맴돌았다.


'배낭을 메고 4성급 호텔에 가면 좀 웃기더라고.'


낭만만으로 여행할 수 없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누구나 하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많겠지만, 한정된 시간과 한정된 예산으로 인해 결국 취사선택을 해야만 한다. 당시 나는 8개월간의 여행 중 3개월 차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여행의 기간이 길면 더 많은 선택과 고민이 필요하다. 기간이 길수록 지출 또한 많아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인데, 그럼에도 총액을 어떻게든 줄여보기 위해 가장 저렴한 옵션을 선택하게 된다. 장기여행자, 배낭여행자는 어떤 상황에서든 무조건 돈을 아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산만큼이나 새로운 경험도 중요했다. 돈은 다시 벌 수 있어도 이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몇 주를 기차에서 보내는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꽤 오랫동안 버킷리스트에 있는 사람으로서, 침대칸에서 자보고 싶다는 소망이라도 이루어보기로 했다. 일반석에서도 잠은 잘 수 있겠지만, 내가 해보고 싶었던 건 기차 안에서 누워보는 것이었으니까. 다음 이동, 다음 숙박에서 돈을 더 아끼는 한이 있더라도 여기서는 돈을 조금 더 들이는 선택을 하기로 했다.


그렇게 꽤 비싼 기차여행을 예약했다. 출발 전날 산사태로 인해 시애틀에서 포틀랜드 구간이 버스로 변경되는 바람에 22시간 30분짜리 기차 여행은 18시간짜리 기차여행으로 바뀌어버렸지만, 여전히 편안한 좌석에서의 긴 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버스를 타고 포틀랜드 역에 도착해 시간을 조금 보낸 뒤, 드디어 기차에 올라탔다. 침대 칸에는 평범해 보이는 좌석 두 개가 마주 보고 있었다. 문도 있고 커튼도 있고, 각 차량마다 승무원도 배정되어 있었다. 두 명이 쓰는 침대칸을 혼자 쓰려니, 비싼 만큼 더 넓고 편안했다.



사실 포틀랜드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구간은 창밖으로 보이는 경치가 특별하지는 않다. 원래는 샌프란시스코에서 LA로 가는 길에 보이는 해안선이 가장 유명한데, 나는 샌프란시스코에 들러야 했으므로 나의 기차여행도 샌프란시스코에서 끊겼다. 그럼에도 천천히 달리는 기차 안에서 편안하게 아무 생각 없이 있을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이었다.


어쩌면 오히려 풍경이 멋지지 않아서 더 잘 쉴 수 있었던 것 같다. 풍경이 근사했다면 사진 찍으랴, 기록랴, 기분이야 좋았겠지만 바빴을지도 모른다. 장기 여행을 할 때는 종종 여행에서도 쉼이 필요했다. 아무 생각 없이 앉아만 있으면 기차가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었고, 식당칸으로 걸어가면 식사가 해결되었다. 게다가 내리면 사촌언니가 역으로 데리러 나와 있을 샌프란시스코인 데다, 이전에도 짧지만 이미 여행을 해봤던 곳이었다. 내려서 어디서 뭘 할지에 대한 걱정도 없었으니 아주 드물게도 완벽한 쉼이 가능한 이동이었다.


무료로 제공되는 식사까지 정말 훌륭했다. 식사 시간이 단 3번뿐이라는 게 아쉬울 정도로 모든 메뉴는 푸짐하고 맛있었다. 식당칸에서는 다른 일행들과 합석하곤 했는데, 마침 LA의 디즈니랜드로 향하는 가족 단위 승객들이 많았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모두 들뜬상태였기에 나까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저희는 아까 점심 먹고 디저트는 포장해서 자리로 가서 먹었어요."

"그런 것도 가능한 거였어요?"


합석한 가족으로부터 고급 정보를 입수한 나는, 저녁에 메인 요리로 스테이크를 먹은 뒤, 디저트로 초콜릿 케이크를 포장해 왔다. 케이크를 자르면 안에서 초콜릿이 흘러나오는 초콜릿 라바 케이크였다. 나만의 칸에서 노트북에 담겨있던 오래된 영화 한 편을 보며 달콤 따뜻한 디저트를 즐기니 그 자그마한 곳이 4성급 호텔이 되었다.



저녁 8시쯤 되자, 승무원이 와서 문을 두드렸다. 좌석을 침대로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원래 이 칸을 둘이서 쓰면 2층 침대처럼 머리 위에도 침대 하나가 또 만들어지지만, 나는 혼자였기 때문에 밑에 의자 두 개만을 붙여 침대 하나만 만들어주었다. 덕분에 다른 사람들보다 기차 천장이 높게 느껴져 탁 트이고 편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불을 끄니, 바깥의 달과 별들이 잘 보였다. 이불을 덮고 누워 포근한 상태로 창밖의 영화를 이어서 보는 느낌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기차는 종종 기차역에 섰고, 사람들이 타고 내렸다. 누군가에게는 짧은 이동수단에 불과할지도 모를 이 기차가 나에게는 밤을 보내는 숙소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재미있었다. 때로는 먼 하늘의 달과 별들을, 때로는 가까운 역의 가로등을 보며 나는 세상의 여러 불빛들 속에서 잠이 들었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커튼 사이로 비치는 아침 햇살을 맞으며 서서히 잠에서 깼다. 알람을 맞추지도 않았지만 마치 캠핑을 하듯, 태양의 시간에 맞추어 잠들고 깬 기분이었다.


역시나 근사한 아침식사를 마지막으로 기차 여행은 마무리가 되었고,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하차했다. 기차에서 보낸 18시간이 너무나도 편안해서, 사람들이 크루즈 여행을 하는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동이 휴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순간이었다.



우리가 돈을 아끼는 이유는 결국 더 원하는 곳에 돈을 더 쓰기 위함이다. 나중에 있을지도 모를 어떤 일을 위해 아껴두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당장 돈을 쓸 가치가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면 굳이 미뤄두기만 할 필요는 없다.


8개월 동안 내 몸만 한 44리터짜리 배낭을 메고, 나는 물가가 저렴한 국가부터 극도로 사악한 국가까지 다양하게 돌아다녔다. 그 속에서 느낀 것은, 내게 정말로 의미 있는 일이라면 그게 가장 저렴한 선택지가 아닐지라도 선택할 가치가 있다는 것.


우리는 각자 다른 것에 더 큰 가치를 둔다. 배낭을 메고 4성급 호텔에 가는 사람도, 자기가 생각하는 더 중요한 가치에 돈을 지불하는 것뿐이다. 돈을 일부러 낭비할 이유는 없지만, 과도한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그 선택이 어떤 이유로든 만족스럽다면, 그건 결코 아까운 일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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