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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Jun 26. 2024

지나온 길을 되짚어보기

등산은 왕복

"아니, 어차피 내려올 걸, 왜 올라가?"


네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다녀온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등산을 좋아하지 않는다. 안나푸르나에 다녀온 건 꼭 보고 싶은 풍경이 있어서였고, 지금도 보고 싶은 풍경이 있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산을 하러 가지만,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이동은 언제나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하는 것이지만, 등산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등산로 입구에서 정상까지 오르고 나면 끝이 아니라, 다시 입구로 되돌아와야 하니까. 나는 그 점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게다가 대부분의 경우 같은 길을 고스란히 다시 걸어야 한다. 이 모든 게 이중고 같아서 불만이다.


"곰배령은 진짜 완만해. 길도 예쁘고, 지금 가면 야생화도 많대."


강원도 인제에 있는 곰배령은 이름 그대로 곰의 배를 닮았다 해서 그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름은 친근하지만 쉽게 방문할 수는 없다.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일 년 중 봄부터 가을까지 지정된 기간에만 입산이 허용되고, 월요일과 화요일은 휴일이며, 반드시 사전에 신청해야만 입산할 수 있다. 그렇게 철저하게 관리를 해서인지, 깨끗하고 예쁘게 보호되어 월마다 다양하게 피는 야생화로 매우 유명하다.


야생화라면, 내가 등산을 하는 1원칙, '보고 싶은 풍경이 있는가'에 들어맞았다. 그렇다면 가야지.


그래서 지난 5월, 엄마와 곰배령에 다녀왔다. 엄마는 몇 해 전 가을에 아빠와 방문하셨다가 너무나 마음에 들어 꼭 야생화가 많이 피는 봄이나 여름에 다시 찾아보고 싶다고 하셨다.



곰배령의 5월은, 입구에서부터 푸르름이 가득했다. 입구에서 방문자 이름을 확인한 후 곧장 초록빛 터널로 들어서니 바깥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새로운 세상에 들어선 것 같았다. 5월 중순의 초록빛은 어린잎들이 새록새록 자라나는 때라 그런지 더 연하고 싱그럽게 느껴졌다. 게다가 엄마 말이 맞았다. 등산이 아니라 마치 숲을 걷는 것처럼 길이 완만했고, 탐방로 옆으로는 계곡이 지나 물소리와 바람소리를 들으며 여유로운 마음으로 걸을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그 싱그러운 빛깔들 사이사이에는, 은은한 야생화들이 많이 피어있었다. 곰배령에서는 월별로 다른 꽃들을 볼 수 있는데, 5월은 충분히 즐기기엔 아직 이르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다양한 꽃들이 곳곳에서 반겨주고 있었다. 야생화들은 대체로 자그마해서, 주변을 주의 깊게 둘러보아야만 크고 긴 초록빛 풀들 틈 사이에 숨어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열심히 살펴보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상 같아서 왠지 더 기분이 좋았다.



결과보다 과정이 아름답다는 건, 이런 길을 두고 하는 말일까. 길이 평탄한 것도 한몫했지만 걷는 내내 보이는 작은 폭포들과 머리 위 나뭇잎들, 곳곳에 숨겨진 작은 상들이 만들어주는 편안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처음으로 정상까지 올라가지 않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했던 대부분의 등산은 정상에서 보는 전망을 보기 위해 가는 길을 참고 인내하는 것이었는데, 여기는 가는 길 자체가 이미 완벽했다. 물론, 마지막 30분 정도의 오르막길을 지나 만난 정상도 예뻤다.


그리 힘든 길은 아니었지만, 평소 워낙 등산을 하지 않는 사람이 계획했던 것보다 빠르게 도착했으므로 나름의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운 좋게도 날이 맑아서 저 멀리 설악산까지 보여 더욱 들떴다. 5월인데 설악산 정상에는 눈이 내려앉아 있었다. 흔히 볼 수 없는 풍경이었으므로 신비롭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상기후로 인한 현상에 지구가 걱정되기도 했다. 곰배령이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는 것처럼, 지구 전체를 그렇게 지정했으면 좋겠다는 말이 되지 않는 바람을 생각해 보며, 정상의 빛깔들을 여유롭게 즐겼다.



이윽고 내가 등산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하산길 차례였다. 물론 하산길은 대개 어렵지 않다. 특히 곰배령의 경우 오르막길이 편했던 만큼 내리막길도 가파르지 않아서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저, 같은 길을 곧바로 다시 내려가야 한다는 일 자체가 반가운 일이 아니었을 뿐이다.


그러나 곰배령의 탐방로를 반대로 내려가보니, 올라가는 길에는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올라갈 때는 계단에 가려졌던 야생화들이 반대방향으로 걷자 그제야 선명히 보였고, 올라올 때는 그저 똑같다고 생각했던 나무도 내려갈 때는 그 반대편에 파인 구멍과 그 속에서 자라나는 작은 새싹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같은 길도 방향과 시선이 달라지니 전혀 다른 길이 되었다. 야생화를 찾고자 주변에 관심을 가지니 가능했던 발견이었다.



평소의 우리는 그저 한 방향으로 달리기 바빠서, 뒤돌아 같은 길을 다시 살펴볼 시간 같은 건 없다. 지만 모든 등산은 왕복이다. 설령 힘들어서 정상까지 가지 못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걷기를 멈출 수는 없다. 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반드시 걸어온 길을 다시 한번 더 걷게 되어있다. 정상에 올라도 정상에서 바로 다음 산으로 옮겨갈 수 없고, 왔던 길을 되돌아나가야만 비로소 다른 길을 택할 수 있다.


우리는 등산을 통해, 선택한 길에 대해 책임을 지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중단하고 싶어도, 왔던 길을 되짚어보지 않으면 벗어날 수 없는 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만큼 꾸역꾸역 걸어온 길일지라도, 곧이어 다시 걸어야 하는 일.


하루하루 빠르게 지나가버리면 길 위의 사소한 부분들은 놓치게 마련이다. 내가 겪은 길임에도 여전히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있고, 아는 것들이라 할지라도 곧 잊어버리곤 한다. 많은 길을 걸어도 지나온 길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그게 제자리걸음인지도 모른다.


곰배령 입구로 되돌아 나오는 동안, 나는 새로운 길을 걸었다. 한쪽만 보느라 지나쳐버리고 말았던 아름다움을 차분하게 다시 발견해 볼 수 있었다. 다 본 줄 알았는데 다 본 것이 아니었고, 같은 길인 줄 알았는데 같은 길이 아니었다. 그건 오직 왕복을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 시선이자 특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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