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어쩌면 출발하기 전까지의 이야기. 하지만 여전히, 어떤 일에 도달하기 전까지의 이야기.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공백 없이 연속적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때로 움직이지 못하고 한없이 대기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마음이 움직인다. 앞으로의 일들을 아직 알 수 없어서 몹시 불안한 상태에서의 몸부림, 아니, 마음부림.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시간이 앞당겨지지는 않는다.
8개월간 세계여행을 하던 때, 여행을 시작하고 3개월 정도 지난 시점, 나는 친구와 함께 나미비아를 여행했다. 여행을 마친 뒤 수도인 빈트후크 공항에서 함께 요하네스버그행 비행기를 탔지만, 우리는 도착 후 공항에서 헤어졌다. 친구는 한국으로 가기 위해 다시 환승을 하러 갔고 나는 입국 신고를 했다. 남아공에서 출발하는 캠핑 투어에 참가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남아공에서 출발해 보츠와나, 짐바브웨, 잠비아, 말라위, 탄자니아를 거쳐 케냐까지 가는 5주 간의 투어였다.
이런 헤어짐이 처음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는 혼자 하는 여행이었지만, 중간중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때도 있었다. 엄마와 5주간 함께 남미를 여행하고 헤어지기도 했고, 미국에서는 도시 곳곳에서 친구들을 만났다가 헤어졌다. 이번에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친구와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보내고 각자 가야 할 길로 떠난 것뿐이었다. 잠깐동안은 함께 했던 시간이 그리울지라도, 곧 새로운 여정에 푹 빠지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4일간의 공백 때문이었을까. 내 마음은 자꾸만 불편한 요동을 쳤다.
친구와의 일정과 캠핑투어의 일정이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아서, 내가 신청한 캠핑투어는 내가 요하네스버그에 도착하고 4일 후에야 시작되었다. 그 4일 동안 주변을 알차게 구경할 수 있었거나 다른 투숙객들과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면 달랐겠지만, 애석하게도 내가 머물렀던 호스텔의 환경은 그 어느 것도 제공하지 못했다.
나는 투어사에서 연계해 준 호스텔에서 3박을 묵었다. 투어 출발 전날 묵는 1박에 대한 부분은 투어의 일부였으므로 비용에 포함되었지만, 그전 2박에 대해서는 추가 비용을 내야 했다. 어차피 어디서 묵어도 돈은 비슷하게 들 텐데 이곳에서 내리 묵으면 중간에 숙소를 옮기는 귀찮은 일이라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투어를 진행하는 곳에서 연계해 주는 호스텔이라면 믿을만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나마 첫날은 밤에 도착해서 잠만 잤으므로 그럭저럭 흘러갔다. 투숙객이 없어 개인실로 업그레이드를 해주어서, 청결하지는 않아도 개인 화장실을 쓸 수 있어 나쁘지 않았다. 다음날부터는 7인실 도미토리를 썼는데, 그날도 투숙객은 없어서 넓은 방을 나 혼자 썼다. 왜 손님이 계속 없는 것인지는 그때부터 알 수 있었다. 시설로 보나 위치로 보나, 캠핑 투어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면 일부러 찾아올 만한 숙소는 아니었다.
내 첫 과제는 도미토리실의 침대 7개 중 하나를 고르는 일이었다. 2층 침대 3개와 단층 침대 1개가 있었으니 자연스레 내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단층 침대였다. 하지만 머리맡에는 거미가 대여섯 마리가 매달려 있었다. 재빠르게 발걸음을 돌려 2층 침대들을 살펴보았다. 2층 침대 두 곳은, 2층을 지지하는 프레임에 금이 크게 가 있었다. 2층에서 자다가 침대가 무너지면 내가 굴러 떨어질 수도 있었고, 1층에서 자면 2층에 깔릴 수도 있었다. 다행히 하나 남은 2층 침대에는 금이 없었다. 비록 윗침대 머리맡의 거미줄에는 거미가 세 마리 매달려있었지만, 아랫침대는 거미로부터 안전했다. 그 침대가 내 침대가 되었다. 7인실 안에 있는 유일한 콘센트에서 멀지도 않아서, 불행 중 다행이었다.
누울 곳이 없던 7인실 도미토리룸
하지만 침대를 골라도 편히 쉴 수가 없었다. 침대가 불편한 건 둘째 치고, 그곳에서의 생활이 너무나 갑갑했다. 투숙객은 나 하나뿐인 데다 숙소 주인은 건물에 잘 없었고, 몇 안 되는 직원들도 하루에 한두 번 마주칠 뿐이었다. 방 밖을 벗어나면 어두컴컴한 복도밖에는 없어서, 화장실만 얼른 쓰고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와이파이는 리셉션 근처에서만 잡히고 방에서는 잡히지 않았는데, 리셉션에는 의자조차 없었다. 와이파이를 쓰겠다고 어두운 리셉션 주위를 계속 서성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침대에 누워 배낭 속에 있던 책을 꺼내보았지만, 재미를 붙이지 못해 집중이 되지 않았다.
밖에 나가기라도 했다면 기분 전환이 되었을 텐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요하네스버그가 위험하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외딴 숙소에 갇혀있으니 그 사실이 더 크게 다가왔다. 숙소 주인은 절대 혼자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면서, 내가 마트에서 장을 볼 수 있도록 직접 태워다 줄 정도였으니까.그렇게 감옥 같은 곳에서 나는 지쳐갔다.
처음엔 내가 느끼는 감정이 그저 친구와 헤어지고 난 뒤에 느끼는 외로움인 줄 알았다. 이전에는 이별 뒤에도 외로울 틈 없이, 바로바로 새로운 만남이 있었으니까. 남미 여행 후 엄마와 헤어진 뒤에는 뉴욕에서 곧장 친구를 만났고, 이후에도 계속 친구들과 사촌언니, 혹은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이 연달아 있었다. 그게 아니라도 새로운 랜드마크, 새로운 풍경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낯설고 외딴곳에 혼자 갇혀있어 보니, 비로소 외로움을 크게 느끼게 되었나 보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나고 생각해 보니, 외로움보다는불안함이 훨씬 더 컸다. 앞으로 시작될 5주간의 여행이 어떨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생긴 불안함.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5주를 별일 없이 보낼 수 있을까?'
'이 호스텔도 너무 싫은 내가, 캠핑을 할 수 있을까? 캠핑 경험도 없는데 무려 5주를 버틸 수 있을까? 최근에 미국 서부에서 2박 3일 캠핑한 게 전부인데. 그마저도 하루는 너무 추워서 방을 제공해 주는 바람에 실제로는 하룻밤이었는데.'
'중간에 그만두고 싶으면 어떡하지?'
예약할 당시에는 재밌을 것 같다는 마음으로 신청했지만, 막상 출발일이 다가오니 이런저런 걱정거리들이 생겨났다. 가까운 친구와 편하게 여행을 하고 난 직후였으니, 몇 명인지도 모를 낯선 사람들과 함께 할 긴 시간이 더 막연하게 걱정되었던 것 같다. 게다가 호스텔이 이렇게 힘들면, 캠핑은 얼마나 더 힘들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교환학생으로 프랑스에 처음 갔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나는 홀로 학기가 시작하기 한 달 전에 학교가 있는 도시에 도착했다. 정말 작은 소도시라, 할 것도 없었고 만날 사람도 없었고, 그때도 인터넷은 자주 끊겨서 답답했다. 앞으로 프랑스어를 잘하며 지낼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도 컸다.
'그렇지만, 지금 3일간 느끼는 것만큼 이렇게까지 불안했던가?'
그건 아니었다. 그때는 런던 여행도 다녀왔고, 마트에 장을 보러 나가서 현지인들을 마주치기도 했고, 빵집에 가서 친절한 빵집 주인과 대화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내 주의를 분산시키면서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소소한 즐거움을 찾았다.
아무것도 할 게 없으면 사람의 생각은 상상의 나래를 끝없이 펼치며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뭐든 혼자서 잘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건만, 생각해 보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고독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언제나, 혼자서 ‘무언가를 하는 것’을 좋아했던 것이다. 나는 나를 혼자 내버려 두었던 적은 없었다.
몇 시간을 내리 침대 이불속에 숨어 있다가, 나 자신을 돌봐주기 위해 지금 내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결국 여행 출발 후 처음으로, 돈을 내고 데이터로밍을 했다. 당장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온라인으로라도 연결되어야 했다. 꼭 사람이 필요했다기보다는, 내 주의를 돌리기 위함이었다. 식당에서 숟가락을 가지고 식탁을 내리치는 아기에게 뽀로로 영상을 틀어주듯이.
나는 유튜브에서 재미있는 영상들을 찾아 스스로를 웃게 했고, 아직 잠들지 않은 한국 친구들과 연락을 하며 그들의 하루 이야기를 들었다. 앞으로 하게 될 여행의 좋은 후기들을 찾아보며 설렘을 되찾기도 했고, 묵고 있던 호스텔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재치 있게 쓴 후기를 발견하고는 통쾌함을 느끼기도 했다. 주의를 분산시켜 생각이 다양한 곳에 머물게 되자, 걱정거리들은 흐릿해지고 불안하던 마음도 가라앉았다. 아무 데도 나갈 수 없고 아무도 만날 수 없었던 요하네스버그의 호스텔에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셋째 날 오후, 캐나다인 두 명이 도미토리에 들어왔다. 내가 만난 첫 캠핑투어 동지로, 둘은 오랜 친구 사이였다. 그 두 친구가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나는 인터넷이 필요 없어졌다. 농담과 놀림이 섞인 둘의 대화를 들으며 웃었고, 나를 대하는 그들의 쾌활한 친화력에 편안해졌다. 혼자 있을 때는 엄두도 나지 않던 거미줄 제거를 셋이 함께 해내고, 한 명은 내 침대 위의 2층 침대를, 다른 한 명은 단층 침대를 차지했다. (정말 다행히도 이후 다른 사람들은 다른 방으로 배정되어, 금이 간 침대를 써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기서 혼자 3일째라고요? 와, 난 오늘 밤을 보내는 것도 걱정인데. 우리 캠핑 어떻게 하죠?"
호스텔의 상태에 놀란 둘은 나와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한 명은 캠핑 경험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다른 한 명은 거의 처음이라고 했다. 하지만 캠핑 경험이 있는 친구도 호스텔의 상태를 보고는 이후 캠핑장들의 상태를 심각하게 걱정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후 캠핑을 하면서, '그 호스텔이 최악의 숙소일 줄이야!'라는 말을 종종 했다. 땅을 파서 만든 임시 화장실을 써야 했던 노지 캠핑까지도 통틀어서 한 말이었다.)
혼자 걱정하는 건 불안이지만, 함께 걱정하는 건 공감이었다. 내가 혼자서만 생각하고 불안해하던 것들을 입 밖으로 내뱉고 공감을 받고 나니, 내게는 동지들이 생겼다. 내 몸을 조이고 있던 긴장과 불안이 스르르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저녁때쯤 다른 멤버들도 하나둘 도착했고, 아무도 없던 호스텔 앞 정원의 통나무 의자는 사람들로 빼곡해졌다. 내가 그곳에 도착하고 난 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리는 각자 손에 들린 맥주와 함께 서로 인사를 나누었고, 드디어 5주를 함께 할 사람들을 만나고 나니 나는 더 이상 걱정되지 않았다. 언제나, 실체를 알고 나면 겁나지 않는다.
드디어, 투어 차량을 처음 탔던 아침
우리가 안 좋은 상상을 하며 걱정하는 것들은 대부분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것, 아직 확정되지 않은 것들이다. 하지만 현재에는 언제나 불확실한 미래가 동반된다. 그 불확실한 미래가 확실해지면, 또 다른 불확실한 미래가 다가온다. 그러니 안타깝지만 걱정거리가 없는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는 것. 시간이 지나면 불확실했던 것은 점차 선명해지고, 그러면 우리는 괜찮아질 테다.
물론 그 사실을 알고 있어도, 갑자기 걱정을 멈추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내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는 방법을 택했다. 아예 처음부터 걱정을 하지 않기엔, 나의 대단한 상상력이 크나큰 방해가 되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인 건, 내 망각력도 꽤나 대단하다는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지만, 즐길 수 없다면 피하는 것도 방법이었다. 알지 못하는 미래가 현실로 나타나기 전까지, 잠시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이후 나는 혹시 모를 비슷한 상황에 대비해 재미있는 사진들을 따로 모아두었고, 떠올리기만 해도 나를 웃게 하는 에피소드들을 구체적으로 메모해 두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 정도의 불안감을 느낄 일은 없었다. 요하네스버그의 호스텔에서처럼 불편한 장소에 혼자 고립되는 일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다시 요하네스버그의 그 호스텔로 돌아가는 일이 있다고 해도, 나는 그때보다 훨씬 더 빠르게 나를 달래줄 수 있을 것 같다.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나는 이제 알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