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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May 22. 2024

누군가의 집을 뺏었다

* 오늘 글은 도착하고 난 뒤의 이야기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시점을 달리해봅시다.


어느 일요일, 공연을 보고 오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환기를 시키기 위해 창문을 열려는 순간, 내 눈앞에 벌 한 마리가 나타났다. 아직 창문을 열기 전이었고 창문을 열었다 해도 방충망은 있었지만, 그래도 꽤 큰 크기였기에 순간 내 몸은 얼음이 되었다.


그런데 다시 보니, 그 옆에 벌이 한 마리가 더 있었고, 옆에는 또 한 마리가...


큰일 났다. 낮에 나갔다 온 사이, 내 방 창밖에 벌집이 지어진 것이다.



구석진 곳에 주먹 만한 벌집을 지어놓고, 그 주위를 수 마리의 벌들이 날아다니고 기어 다녔다. 나는 순식간에 패닉이 되었다. 어릴 때 벌에 쏘였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이제 흉터는 희미해져 거의 보이지 않지만 공포심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포털사이트를 검색해 보니 119에 전화하면 된다고 했다. 생명을 다루는 더 위급한 일들도 많을 텐데 이런 걸로 119에 전화를 하는 것이 맞는가에 대해서는 잠시 고민했으나, 그렇다고 내가 직접 제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인생 처음으로 휴대폰에 1, 1, 9를 누르고 통화 연결 버튼을 눌렀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집 창문 밖에 벌집이 생겼는데요... 여기 전화하는 것이 맞나요?"

"네, 어느 정도의 크기인가요?"

"음.. 주먹만 해요."

"네, 알겠습니다. 지금 근처에 벌집 신고 전화가 많아서 방문에 시간이 조금 걸릴 수 있는 점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신고 전화가 많다는 것이 왠지 위안이 되었다. 아파트단지에 벌집이 생기는 것이 종종 있는 일이고, 나 혼자만 유난 떠는 건 아니라는 것이었으니까.



전화로 신고를 해두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리고는 집에 있던 페트병 물과 음료수들을 시원해지도록 냉장고에 넣어놓고, 부엌에 있는 간식을 한 움큼 꺼내 쇼핑백에 담았다. 몇 분이나 오실진 몰랐지만, 사소한 일을 당한 사람들만이 준비해 드릴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간식을 한 주먹 더 집어 들었다.


신고한 지 30분쯤 지났을 때, 모르는 휴대폰 번호로 전화가 왔다. 상황을 확인하고자 전화한 구급대원이었다.


"제가 미리 뭘 해야 하는 게 있을까요?"

"아니요, 저희가 알아서 합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창문 주변에 있는 잔 짐들을 조금 치워두고, 유리문 너머 창밖을 슬며시 바라봤다. 혹시 그 사이에 벌집이 떨어졌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망으로. 하지만 커다란 벌 두 마리가 지나갈 뿐이었다.


그로부터 30분 정도 더 지나자, 구급대원 세 명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주먹 만한 벌집을 제거하는 데에 세 명이나 필요한가 싶었지만,


"작네, 금방이야."


라고 하신 걸로 보아 혹시 모를 것에 대비해 넉넉한 인원이 온 듯했다. 앞장서서 방으로 들어간 대원이 창문을 열고 방충망을 사이에 둔 채 벌레퇴치제 같은 것을 뿌렸다. 곧 작업을 시작할 것 같아서 나는 그 사이에 냉장고에 넣어둔 음료들과 간식을 담은 쇼핑백을 챙겨서 들고 왔다.


"다 됐습니다!"


부엌에 다녀오는 그 잠시의 시간 사이에 끝나버려, 제거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다. 방으로 돌아와 보니 바깥 벽이 깨끗해져 있었다. 이렇게 빨리 끝나는 일이었다니, 당황스러우면서도 마음이 놓여 긴장이 조금 풀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금 아마 일벌들은 여기 없었을 거예요. 당분간은 일벌들이 집 찾으러 돌아올 수가 있어요. 그러니 며칠간은 방충망 꼭 잘 닫아두시고 가급적 창문 열지 마세요."


제거한다고 완전히 끝난 게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로 제거 후 며칠 동안 벌들이 근처로 날아와서 몇 바퀴씩 날다가 사라지곤 했다.



벌들은 아마 집이 없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을 테다. 돌아온 곳에 집이 사라져 있는 건 얼마나 절망스러운 일일까. 벌들이 인간과 같은 감정을 느끼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벌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을지에 대한 고민은 오래오래 내 머릿속 한 구석에 남아있었다.


쏘일 각오를 하고 벌집과 공존할 수는 없었겠지만, 남의 집을 없애버렸다는 사실에 어쩔 수 없는 미안함을 느꼈다. 언제나 밖을 마음 놓고 돌아다닐 수 있는 건 언젠가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인데, 그런 존재가 사라지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집을 잃은 벌들에 대해 열심히 검색한 결과, 벌집을 완전히 없앤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라면 벌들이 다시 집을 찾아갈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근처로 옮길 경우이기 때문에, 아파트 빌딩 숲에서 제거된 벌집이라면 옮겨진다 해도 꽤나 먼 곳일 테니 찾아가긴 쉽지 않을 것이다. 만약 본래 집을 찾아가지 못한다면, 다른 집단의 일원이 되거나 새로운 집을 다시 짓기도 한다고 한다.


내 집에 지었던 집을 잃은 벌들은 다시 집을 찾아갔을까? 다른 집에 편입되었을까, 아니면 새로운 집을 지었을까? 일주일 정도 지나자, 더 이상 창밖에는 벌들이 날아다니지 않았다. 어떻게든, 벌들이 결국엔 집에 도착했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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