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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May 15. 2024

나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죽는다

비행기 안

친구와 함께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중이었다. 친구는 휴대폰을 보고 나는 내 생각 속에 빠져 있었다. 건설현장 근처를 지나자 건설 자재들을 잔뜩 실은 대형 트럭들이 양 옆을 오갔다. 그럴 때마다 버스는 바람에 흔들리듯 움직였다.


갑자기 버스가 옆에 지나가던 트럭과 부딪친다. 안전 바도 없는 맨 뒤 중앙석에 타고 있던 학생이 그 충격과 반동에 앞으로 튀어나온다. 내 옆자리 아주머니의 장바구니 카트가 쓰러지면서 근처에 서 있던 사람들을 넘어뜨린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연기가 난다. 버스의 두 문은 이미 트럭과 부딪치며 망가졌고, 탈출할 방법은 창문을 통해 빠져나가는 것뿐이다. 비상망치의 위치를 확인한다. 망치로 창문을 모두 깨야 한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내 머릿속 카오스를 깬 친구의 말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응? 아니, 그냥."


아무에게도 말해본 적은 없는 상상이다. 일반적으로 하는 생각은 아닐 것 같아서 이날도 그냥 얼버무렸다. 어차피 썩 유쾌한 상상도 아니니까.


안전불감증이 사회적 문제라는데, 나는 늘 안전민감증인 것이 문제다. 대중교통을 탈 때마다 혹은 좁은 장소에 있을 때마다 사고가 나는 상상을 한다. 실제로 그런 큰 사고를 겪어본 적은 없으니 막상 닥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언제 올지 모르는 위기에 혼자서 대비하는 것뿐이다. 비상문이 어디에 있는지, 망치가 어디에 있고 비상벨이 어디에 있는지를 수시로 확인한다.


나는 혼자서 이곳저곳을 여행할 때도 위험하다고 하면 발도 들이지 않을 정도로 내 목숨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라, 오히려 죽음에 대한 상상을 더 자주 하는 것 같다. 기차를 탈 때는 열차가 끊어지고 넘어지는 상상을,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면 바닥이 푹 꺼지는 상상을 한다. 그럴 경우 어떻게 탈출할 것인지를 머릿속으로 구상한다. 실제 그런 일이 터지면 머리 굴릴 새도 없이 패닉에 빠지겠지만, 나도 모르게 계속 상상하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렇지만 탈출 구상 자체가 안 되는 경우도 있다. 바로 비행기에서다. 이미 상공 위를 날고 있는 상태에서는 사고가 날 경우 탑승객 전원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가장 사고율이 높다는 이착륙 시에도 사정은 비슷하다. 아마 비행기에서는 탈출 루트를 구상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비행기에서 나는 조금 다른 상상을 한다. 다소 극단적이지만, 나는 한 번씩 죽음을 맞이해 본다. 요란스럽게 이륙하는 순간이면, 또는 상공에서 기체가 흔들리는 순간이면, 늘 내 감정도 그렇게 함께 요동친다.


그 소음과 흔들림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남을까'보다는 '어떤 마지막 메시지를 남겨야 할까'를 고민한다. 텀블러에 메모지를 찢어 넣으면 누군가에게 닿게 될까, 지금 여기서 문자 메시지를 보내면 정상적으로 발송될까 하는 생각들.


하지만 메시지를 남길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은 수도 없이 해왔으면서도, 정작 어떤 메시지를 남겨야 할지에 대해서는 마음을 정해본 적이 없다. 단순한 메시지가 아니라 유언이 될 거라는 생각에, 늘 마침표를 찍기가 어렵다. 사랑한다는 말, 고마웠다는 말, 나는 충분히 후회 없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살았다는 말. 왠지 더 대단한 말을 남겨야만 할 것 같은데, 이 이상으로 중요한 말을 찾지 못했다.


전할 말들이 그뿐이라면, 이 짧은 말들을 왜 마지막 순간이 닥칠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


비행기가 아니라도, 죽음은 언제 어디서나 닥칠 수 있다. 우리는 대부분 마지막 순간이 오는 걸 미리 알지 못한 채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지막 메시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적을 새조차 없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최대한 오래도록 세상을 구경하고 싶기에 그 순간을 불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못 될 것 같지만, 적어도 그 순간 후회가 밀려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니 굳이 마지막 말을 전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해 본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아쉬움 없이 하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담아두지 말고 전하는.


죽음에 대한 생각은 언제나 생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어떤 죽음을 맞이하고 싶냐는 물음은 어떤 삶을 살고 싶냐는 물음과 같았다.


내 삶의 기한이 언제인지를 깨달았을 때 다급하게 정리하는 삶이 아니라, 평소에 이미 진심을 다하며 사는 삶을 살고 싶다. 그래서 언젠가 내가 떠났을 때, 남아있는 사람들이 나를 생각할 때 너무 안타까워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이미 그들과 함께 한 시간 속에서 나만의 천국을 충분히 누렸음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알도록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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