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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May 08. 2024

함께 걷는 연습

첫 스위스 여행

교환학생으로 갔던 프랑스에서 런던으로 2박 3일간 인생 첫 나 홀로 여행을 다녀온 뒤, 나는 자신감이 붙었다. 이후 시간이 날 때마다 유럽 곳곳으로 향했다. 같이 여행을 다닐 친구가 생기기 전까진 늘 혼자 계획하고 혼자 떠났다. 그런데 혼자 하는 여행에도, 종종 동행자가 생기는 경우가 있었다. 유럽의 주요 도시들에는 늘 한인 민박집이 있었고, 그때 당시 나는 그게 가장 안전한 선택이라고 느껴 자주 이용하곤 했다. 투숙객 전원이 한국인이다 보니, 아침에 각자 계획한 그날의 일정을 주고받다 '같이 갈래요?' 한 마디에 무리가 생기곤 했다.


나도 가끔은 혼자 찾아가기 부담스러운 곳이나, 여럿이 가는 것이 더 즐거울 것 같을 때는 그렇게 동행이 생기는 것이 즐겁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동행이 즐거운 기억으로 마무리되는 건 아니었다. 지금도 소식이 궁금할 정도로 재미있는 사람들과 감상을 나누며 풍요로운 여행을 할 때도 많았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의견에 이리저리 휘둘려 내가 보고자 했던 것들을 다 보지 못한 적도 있었던 것이다. 특히 만 스물로 나이도 많이 어렸던 시절이라, 내게 함께 할 것을 제안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서너 살 이상 차이가 나는 언니, 오빠들이었던 탓도 있었다.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은 건 스위스 여행이었다. 스위스에 처음 갔을 때는 루체른과 인터라켄, 그리고 융프라우를 계획하고 갔다. 산과 호수로 둘러싸인 루체른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숙소에서 한 언니를 알게 되었고 우리는 함께 루체른의 명소인 리기산에 올랐다. 리기산은 산악열차를 타고 올라가면 되지만, 거기서 도보로 조금 더 올라가면 더 멋진 전망을 내려다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산악열차에서 내리자, 생각보다 강한 추위와 가득 찬 안개에 우리 둘 다 당황했다. 몇 걸음 올라가다 언니는 더 이상 걷고 싶어 하지 않았다.


"어우, 추워! 나는 그만 가고 싶은데, 차라리 밑으로 걸어가 볼까요?"


물론 나 역시 추웠고 안개 때문에 걷기 쉽지도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옆에서 계속 올라오는 사람들을 보며, 시간도 여유로운데 끝까지 올라가 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머뭇거리는 내게, 언니는 이 정도 날씨면 올라가도 별 거 없을 거라고 했고, 나는 결국 바로 휩쓸리고 말았다.



하지만 혼자였다면 고민 없이 올라갔을 것 같다. 나는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여행지를 코앞에 두고 되돌아가는 성향의 사람이 아니니까. 그러나 그때의 나는 남의 말에 쉽게 흔들리는 사람이었고, 또한 굉장히 소심한 사람이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무조건 양보하던 사람. '저는 좀 더 올라가 보고 싶은데요, 나중에 밑에서 만나실래요?' 정도의 말을 한다고 해서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말이다.


안타깝게도 아쉬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며칠 후, 루체른에서 스위스 알프스의 인기 있는 봉우리인 융프라우를 향하는 날이었다. 나는 민박집에서 나와 비슷한 일정을 계획한 한국인 언니, 오빠와 함께 출발했다. 그런데 가는 길에, 우리와 반대방향으로 오는 사람들을 마주치게 되었다. 그날 아침에 융프라우에 올랐다가 우리와 반대로 루체른으로 향하는 사람들이었다.


"날씨가 너무 안 좋아서, 이게 산인지 바다인지... 그냥 뿌연 안개만 보고 왔어요."


그들이 찍어온 사진 속에는 하얀 장막 앞에 서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우리도 그냥 가지 말까요? 거기 왕복 기차표만 해도 얼만데."

"네, 저는 꼭 안 가도 돼서, 가다가 좋은 곳 있으면 딴 데 가도 좋을 것 같아요!"


물론 나도 뿌연 사진을 보고 기대감이 많이 식은 상태이기는 했다. 하지만 만약 리기산에서 추위와 안개를 뚫고 의외로 멋진 풍경을 보고 왔다면, 아니 최소한 날이 갤 가능성이라도 봤다면, 이때도 희망을 걸고 융프라우에 올라가지 않았을까? 이후 여러 번의 여행을 통해 나는 산 위에서의 날씨가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잘 알고 있다. 그날 오전에 융프라우에 올랐던 사람들이 본 풍경과 내가 그날 오후에 봤을 풍경은 전혀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도 나는 결국 분위기에 휩쓸린 채, 융프라우를 포기하고 말았다.



가는 중에 방향과 목적지를 틀어버리는 건 흔한 일이다. 내가 혼자였어도 리기산 위로 걸어 올라가지 않거나, 융프라우까지 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아쉬운 건 그때의 내 선택이 온전한 나의 선택이 아니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누군가와 함께 할 때는 당연히 양보가 필요하다. 하지만 양보도 어디까지나 내가 포기해도 괜찮은 걸 포기하는 일이다. 함께 융프라우를 보기 위해 출발했다면, 융프라우까지 가는 과정 중에 생겨나는 선택지들은 어느 정도 양보하고 포기하더라도, 융프라우를 보는 것 자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목적지가 변경된다면 그 동행의 목적은 사라지는 것이므로 계속 함께 해야 할 의무도 없어진다. 그런데 그때의 나는 한 번 시작된 동행은 내가 양보를 해서라도 같이 끝맺음을 해야 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게 후회할 일들을 경험한 후부터는 더 조심스러워졌고 더 신중해졌다. 누군가와 함께 떠나는 것을 고려할 때는 계획한 일정이 나와 동일한지, 내가 보고 싶어 하는 것들을 그 사람도 나만큼이나 보고 싶어 하는지를 미리 확인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진심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더욱 자주 자문해 보게 되었다. 나중에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내가 분위기에 쉽게 휩쓸려버린 이유는 스스로 어떤 걸 양보할 수 있고 어떤 걸 양보할 수 없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상대방의 의견에 이끌려 다니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 내가 꼭 하고 싶은 것이 뭔지를 정확히 알아야 했다.


내가 내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부터는 마음속에 단단한 무언가가 생겼다. 무조건적으로 양보를 하던 쓸데없이 착한 마음에,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포기할 수 없는 벽이 하나 올라왔다. 그렇게 되니 누군가와 함께 해서 아쉬운 경험은 많이 줄어들었다. 함께 동행하는 데에서 발생하는 부수적인 선택지들은 양보하더라도, 최종적인 목표는 잃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변하고 나니, 의외로 혼자 여행하는 것도 더 쉽고 편해졌다. 혼자 다닐 때는 온전히 내가 다 선택할 수 있지만, 오히려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모든 계획이 내 진심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순간들도 많다. 남들이 다 가는 곳이라고 하면 특별히 내키지 않음에도 일단 계획에 넣고 보는 경우도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누군가와 함께 갈 준비를 할 때면, 타인과 조율해야 한다는 생각에 내 여행의 근본적인 이유를 좀 더 찾아보게 되었다. 덕분에 함께 하는 여행이, 혼자 하는 여행에도 도움이 되었다.


아직도 나는 융프라우에 가보지 못했다. 하지만 덕분에 융프라우의 멋진 풍경을 감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얻었다는 걸 안다. 혼자서든, 누구와 함께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걸 찾고, 그 마음으로 여행하는 방법을.


떠나기 전에 알았다면 좋았을 것들을, 나는 떠나고 나서야 알았다. 하지만 다행이다. 아직도 내 여정은 무궁무진하게 남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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