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출퇴근할 때 세 번의 지하철을 탄다. 하루에 두 번씩 같은 길을 오가니, 매일매일이 반복학습이다. 그러다 보니 내 몸은 어느새 기계적으로 타고 내리기를 반복하였다. 적어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같은 길을 오간 지 3년이 넘은 어느 아침까지는.
그날은 첫 지하철에서부터 내려야 할 곳을 지나쳐버렸다. 잠깐 잠이 들었다가 미처 깨지 못했다. 물론 그것만으로 출근시간을 못 맞추진 않는다. 평소 여유를 두고 출발하기도 하고, 내릴 곳을 지나쳤다 해도 다른 노선을 통해 살짝 우회해서 돌아가면 되기 때문이다. 그 다른 노선이 워낙 익숙하지 않은 노선이라는 것 외에는 딱히 문제 될 것이 없었지만… 익숙하지 않기에 실수를 또 한 번 해버리고 말았다. 반대방향 지하철을 타고 만 것이다. 게다가 잘못 탔다는 걸 곧바로 인지하지 못하고 두어 정거장을 지난 뒤에야 알아버렸다. 서둘러 다시 제대로 된 지하철을 탔지만 이미 늦었다. 그나마 유연출근제라 다행이다. 5시에 퇴근하는 것이 좋아서 8시에 출근하는 것이 일상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날은 9시에 출근하기로 했다.
‘에라, 모르겠다!’
이왕 늦은 거, 나는 오전을 잠시나마 즐기다 가기로 했다.회사 옆에 위치한 공원으로 향했다. 아직 햇빛이 따가운 초가을, 나는 나무 그림자가 진 벤치를 택해 앉았다. 불어드는 약간의 바람이, 당황스러움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혀주었다. 한숨 돌린 뒤 아침 식사로 싸 온 빵과 두유를 가방에서 꺼냈다.
두유를 먼저 한 모금 들이키며, 아침의 공원 풍경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한쪽에서는 수십 마리의 작은 새떼가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연령도 성별도 다양한 무리가 둥그렇게 서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복창을 하는 사람도 없는데 얼마나 여러 번 해온 것인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두가 같은 순간 같은 동작을 하고 있었다. 각자 열심히 오전 시간을 보내는 존재들 틈에서, 나도 가방에서 읽던 책을 꺼냈다.
형광등도 탁자 조명도 아닌 자연광 아래에서 책을 읽는 일은 얼마만인지. 아니, 사실 단 한 번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유럽에 갔을 때 분수대 근처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을 보고 나도 한 번 시늉해 본 것이 전부였던 일이다. 어쩌면 그들도 '공원에 가서 책을 읽어야지'라는 구체적인 결심을 한 것이 아니라, 그저 공원에 들러 가방 속에 지니고 있던 책을 자연스럽게 꺼내 읽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야외에서 펼친 책은 생각보다 빠르게 페이지가 넘어갔다. 지하철이나 침대 위에서 읽을 때와는 색다른 느낌으로 빠져들었다. 문득 이 밝은 평일의 아침 시간을 이렇게 보낼 수도 있다는 사실이, 즐거우면서도 아쉬웠다.평소의 나는 실내에서 일하고있을 시간일 테니까. 하루쯤 아침을 상쾌하게 보낼 수 있는 건 좋았지만, 내일이면 정상적으로 출근해야 할 거라는 사실이 왠지 애석했다.
그런데 그렇게 책을 읽다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니, 나는 내 출근길을 등진 채 남들의 출근길 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 주변에는 공원을 정비하는 사람들이 내내 왔다 갔다 했다. 트레일러 같은 것을 타고 지나가며 주변을 훑는 사람들도 있었고,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공원 구석구석을 살피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앉은 벤치의 나무 데크를 이리저리 밟아보며 어긋난 지점을 찾아 표시해 두었다. 다른 한쪽에는 사다리차 같은 것을 타고 나뭇가지들을 치는 사람도 있었다.
꽤나 자연스럽게 방치된 것처럼 보이던 공원을 그렇게 구석구석 관리한다는 사실은, 평일 오전에 이렇게 한 자리에 앉아 있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날마다 깨끗한 공원을 볼 수 있던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출근, 수많은 사람들의 작업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걸 새삼 느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늘 이렇게 길이 정돈되고 거리가 다듬어지고 있었다는 걸.
비록 나는 얼떨결에 계획되지 않은 일탈을 했지만, 매일 출근하는 사람들 덕분에 이 사회가 돌아간다는 사실이 새삼 든든했다. 매일 같은 길을, 지겨워도 견디고 가는 이들 덕분에, 이 공원도 내가 늘 깨끗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나의 출근도,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는 의미 있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회색빛이라고만 생각했던 내 출근길이 조금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매일 같은 길을 간다고 그 길의 끝이 항상 똑같은 건 아니다. 매일의 출근에는 각각의 다른 의미를 빚어내는 다른 결말이 맺어진다. 사무실에서 딱 5분 거리, 그렇게 일상이 부드러워지는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8시 45분. 천천히 흙길을 걸으며 햇살을 느끼는 것으로 의도하지 않은 아침 일정을 마무리했다. 한 발짝 물러나보는 시간은 한 번씩 꼭 필요한 것 같다. 내가 스스로 찾지 않을 때에도, 종종 이런 기회가 억지로 주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