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출장을 가면서 종종 비즈니스 클래스에 탑승할 기회가 생겼다. 평소 여행을 다니던 때에는 이코노미 외에 고려해 본 적이 없었기에, 비즈니스 클래스를 처음 예약하게 되었을 때 내가 가장 놀랐던 건 가격이었다. 이코노미 좌석의 두 배 정도 되려나 했건만, 무려 세 배가 넘는 가격이었던 것이다.
그렇게까지 비쌀 필요가 있는 건가 싶었지만, 막상 탑승해 보니 느껴지는 편안함이 세 배 이상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물론, 절대적인 가격은 여전히 너무 비싸다고 생각한다) 미국으로 향하는 밤비행기였는데도 비행기에서 밤을 보냈다는 게 믿을 수 없을 만큼 개운했다. 플레이팅 된 식사는 푸짐하고 깔끔했고, 침대처럼 완전히 펼쳐지는 좌석에서의 숙면은 의자를 겨우 젖혀 잠들 때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잠을 잘 때나 화장실을 이용할 때,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따위 없었다. 자리가 편안하니 비행시간이 얼마나 길든 지루하지 않았다.
그만한 돈을 지불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는 돈만 있다면 시간과 편리함까지도 구매할 수 있다. 기차를 탈 때 새마을호 대신 KTX를, 비행기를 탈 때 이코노미 클래스 대신 비즈니스 혹은 퍼스트 클래스를 구입하는 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가치'의 범위를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비즈니스 클래스에 탑승할 때면 몸이 편한 대신 마음이 조금 불편할 때가 종종 있다. 비행기에 따라서는승무원들이 다리를 쭈그린 채 나를 올려다보며 식사 주문을 받는 경우도 있었고, 밤에 승무원을 호출했는데 오래 걸렸다는 이유로 설교하는 한 승객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승무원의 모습을 본 적도 있다. 코로나 시대의 어떤 승객은 요즘 서비스가 옛날 같지 않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그 옆에서 승무원은 웃으면서 그 승객을 달래주려 애썼다. 우리는 서로 너무 과한 서비스를 요구하고 요구받고 있었다.
우리가 돈으로 살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편리한 상품을 너머, 누군가의 친절과 호의까지도 살 수 있을까?
친절과 호의는 돈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존중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친절이 어느 한쪽만이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서비스의 범위에 포함되는 순간, 위계가 생겨버리고 만다.
판매자와 소비자, 서비스직과 고객은 상품으로 맺어지는 일시적인 관계일 뿐이다.우리가 매일 대중교통에서, 거리에서, 오며 가며 만나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인연이다. 판매자나 서비스직이 상품에 종속되지도 않으며,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빚지고 있는 관계도 아니다.
그러니까, 서로를 사람 대 사람으로만 대하면 되는 것이다. 굳이 불친절할 이유도 없지만, 굳이 과한 친절도 필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람과 사람 간에 응당 있어야 할 당연한 상호작용뿐이다.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에게 요구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