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산 북한산 숨은벽 (2022년6월)
잘 생기고 믿음직한 이웃 청년 같은 북한산을 가기 위해 일반 버스를 탄다. 창밖으로 혼잡한 도시 풍경이 잠시 지나가면 홀연히 나타나는 산. 거대하고 허연 바위 곁에서 숲은 한층 더 선연하게 푸르다. 멀리서 바라보면 도저히 오를 듯싶지 않게 험준해 보이지만, 등산로가 분명해서 백운대 같은 높은 봉우리에 오르거나, 주요 봉우리를 잇는 종주를 할 수도 있다.
여러 번 가보았지만, 갈 때마다 다른 느낌이 드는 산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 ‘숨은벽’이라 불리는 봉우리를 찾아갔다. 들머리인 ‘밤골공원 지킴터’에는 밤꽃이 습기를 머금은 무거운 공기를 타고 유난히 짙은 향기를 뿜어냈다. 밤나무는 백발을 산발한 여자처럼 하얀 깃털 같은 꽃을 축축 늘어뜨렸다. 밤꽃에는 실제로 정액의 성분이 들어있어 야릇한 냄새가 난다. 벌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밤꽃의 향이 코를 간질였다. 시인 김광규는 이 향기를 감각적으로 묘사했다.
“술잔처럼 오목하거나 접시처럼 동그랗지 않고 양물처럼 길쭉한 꼴로 밤낮없이 허옇게 뿜어내는 밤꽃 향기”≪밤꽃 향기≫
“허옇게 뿜어내는 밤꽃 향기”를 맡으며 오르는 길은 평탄했다. 숲은 울창했고, 거대한 바위가 뽀얗게 드러나서 거대도시가 지척이라는 사실을 잊었다. 만원 버스에 지쳤던 우리는 6월의 신록으로 위안을 받고 피로를 회복했다. 바위가 이어진 길을 발바닥에 힘을 주고 올라가고, 급경사 바윗길을 만나면 우회로로 돌아갔다. 널찍한 암반을 딛으면서 올라가는 재미가 있었다. 발바닥으로 단단한 화강암의 기운이 올라와 다리에 전해졌다.
북한산에는 23개의 유명한 봉우리가 있다. 보현봉은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북악산 뒤로 보이고, 백운대와 인수봉, 만경대는 북한산의 어디를 가도 잘 보인다. 우리가 가려는 숨은벽은 북한산 최고봉 백운대가 보물처럼 숨겨준다. 500m의 가파른 돌계단을 숨이 깔딱 넘어가게 올라가니 숨어있던 바위산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백운대와 인수봉은 옅은 구름에 가려 ‘곰탕’(등산인에게 흐린 날씨를 말하는 은어) 조망이었고, 그 사이로 A라인 치마를 입고 다소곳이 서 있는 여자 같은 삼각형의 돌산이 나타났다. 웬만한 산꾼이 아니면 정상에 올라가기 어려운 암릉 구간이다.
숨은벽 앞 널따란 암반 끝에는 해골처럼 보이는 바위가 섬뜩하게 놓여있다. 두 눈이 퀭하게 뚫린 백골 같은 커다란 바위는 조금 더 가면 낭떠러지로 떨어진다고 경고하는 듯 살벌한 모양이다. 살짝 내려다보니 정말 초록의 숲이 눈이 시리도록 넓고 깊어 아찔하게 어지러웠다.
숨은벽의 자태를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계곡길을 따라 하산했다. 북한산 계곡에는 속살같이 하얀 암반 위로 투명한 물이 시원하게 흐른다. 우리는 물이 적당하게 고인 곳에서 탁족을 했다. 가뭄이라고 걱정했는데 지난 며칠 내린 비로 계곡물이 풍성했다. 명랑하고 순수한 시원(始原)의 물이 큰물로 가기 전 우리에게 전해졌다. 우리는 발을 담그고 오래 참는 내기를 했다. 나는 얼음같이 차가운 물에 1분도 견디지 못했다. 물살에 맨질맨질해진 바위 위로 물이 우리와 함께 까르르 웃으면서 빠르게 흘러내렸다.
처음으로 높은 산을 올랐을 때 낑낑대고 올라가면, 산행 고수들은 벌써 정상에 올라가 자리를 펴고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있었다. 나는 숨이 차서 헐떡이는데 그곳에서 오래전부터 살고 있었던 신선처럼 태연한 그들이 경이로웠다. 이번 산행에도 등산을 막 시작해 힘들게 따라오는 친구가 있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높은 산에 산신령처럼 오르지는 못하지만, 함께 가는 친구들이 있어 용기를 얻고 힘을 낸다. 등산을 시작한 ‘등린이’나 거의 매일 산에 가는 산꾼이나 말하지 않아도 안다. 세상에 쉬운 산은 없고 그저 오를 뿐이라고. 그 산이 그 산이지만 또 그 산은 그 산이 아니라고. 올라갈 때는 힘들다고 다음에는 산에 가지 않으리라 마음먹지만 내려오면 벌써 산이 그리워 다음 산행을 계획한다고.
날머리에서 돌아보니 숨은벽은 다시 숨었다. 산속에서 홀연히 나타났다가 혼을 빼놓고 사라지는 여인 같은 맵시가 눈에 삼삼하게 떠올랐다. 산에서 내려오면 산이 그리우니 산꾼이 다 되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