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산 지리산 신선대(2022년 5월)
소설 ≪토지≫ 개정판을 미국 버지니아에서 읽었다. 낯선 학교에 적응하려 애쓰는 두 사춘기 아들들과 씨름하며, 미국에 온 것이 과연 옳은 결정이었나 자책하고 있던 때였다. 불평등한 세상에 맞서 의연하고 강단 있게 처신하는 여인 서희는 불안한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래 세상은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 희망을 품고 용기를 내야 해’하고 서희가 이야기해 주는 것 같았다. 책에서는 인간의 욕망과 본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등장인물들이 전라도 어느 시골 마을에서 파닥파닥 살아 숨 쉬었다. 나는 산골 마을과 매력적인 주인공들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았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그곳이 도무지 상상하기 어려워 그리움만 커졌다. 귀국하면 꼭 그 마을을 가보리라 생각했다.
하동의 성제봉(형제봉을 경상도 사투리로)은 100 명산도 아니고 올라가는 길이 험하다. 산행 대장은 1,000m가 넘는 봉우리까지 깎아지른 경사가 이어진 오르막으로 쭉 간다고 했다. 애쓰고 올라가봐야 별 볼거리가 없으니 400m 들머리인 강선재에서 시작해서 신선봉으로 가라고 권했다. 등산 고수들은 거침없이 원래의 험한 산행코스를 택했지만, 우리 일행은 강선재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내리기로 했다.
어린이날이라 어린이가 있는 모든 가족이 어딘가로 떠나는 모양인지 길에 차가 많았다. 예정보다 늦게 도착하여 점심시간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산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자리를 깔고 도시락을 먹었다. 느긋한 산행을 하게 되어 좋았다. 신선대까지 올라가는 경사가 만만하지 않았지만, 성제봉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올려다보니 신선대에 걸쳐 있는 구름다리가 보였다. 앙상한 가지만 달려있던 나무가 언제 이렇게 잎을 내었는지 산은 신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신선대(700m)에서 전성기를 맞이한 철쭉은 산을 분홍빛으로 덮었다. 우리는 자연의 순수한 분홍색에 둘러싸여 들뜨고 설렜다. 인생은 분홍빛이던가. 《la vie en rose》 어디선가 감미로운 샹송이 들려오는 듯했다. “사랑하는 남자의 품에 안겨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면 인생은 분홍빛이 된다”(Quand il me prend dans ses bras, il me parle tout bas, je vois la vie en rose)고. 나는 애인이 아니라 분홍 철쭉에 안겨 분홍빛 시간을 보냈다. 구름다리는 다른 쪽 봉우리를 연결한다. 철근으로 단단하게 만들어 걸을 때마다 출렁거려도 불안하지 않다. 바람이 세게 부는 곳이라 키 큰 나무가 자라지 못하고 철쭉 같은 관목이 퍼져 산 아래가 시원하게 보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면 소설 ‘토지’의 최참판댁 마을인 평사리가 장난감 소품처럼 보인다. 지리산이 둘러싼 마을은 너른 평야를 품고 있고, 다른 한쪽에는 섬진강이 흐른다. 평야는 반듯한 사각형으로 곧았고, 강은 곡선으로 유연했다. 강변의 사구가 봄볕을 받아 멀리 보아도 하얗게 반짝였다. 소설 속 인물들이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 같은 평사리 마을은 고향처럼 친숙했다. 역사에 영원히 남을 문학의 배경이 될 만큼 풍족한 마을이었다. 시름을 잊고 소설에 빠져들었던 과거의 시간이 신선대 위에서 살아났다.
감나무 과수원이 많은 지리산 둘레길로 이어지는 하산길을 따라가면 ‘박경리 문학관’과 ‘최참판댁’이 나온다. 박경리 선생은 평사리에 와보지도 않고 이곳에 “소설의 기둥을 세웠다.” 그리고 직접 와보고는 “누군가가 자신을 도구로 이용해서 서러움을 이야기한 것임을 알았다”라고 서문에서 말한다. 지리산은 ‘한’과 ‘슬픔’이고 악양 평야는 ‘풍요를 약속하는 이상향’을 뜻한다고 했다. 슬픔을 딛고 희망을 전하겠다는 작가의 뜻이 타향에서 절망에 빠져있던 내게도 전해졌음이 분명하다.
천연 염색 제품을 파는 소품 가게, 섬진강 올갱이국을 먹을 수 있는 주점, 고사리나 곶감 같은 지리산 특산물을 파는 상점이 늘어선 마을에서는 소설 속 마을 사람들처럼 서러움과 이상향을 품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관광지가 되어서도 서희의 마을은 품위가 있었다. 박경리 선생은 지리산에 폐를 끼칠까봐 불편해했다고 하지만.
“필시 관광용이 될 최참판댁 때문인데 또 하나, 지리산에 누를 끼친 것이나 아닐까. 지리산의 수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먹고살 만한 사람들에 의해 산은 신음하고 상처투성이다.”(토지1 서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