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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서 열정을 배우다

54산 우이도 (2022년 5월)

by Claireyoonlee

신안 서남문대교는 비금도와 도초도를 연결하는 다리다. 연도교 중 가장 길고(937m) 경사가 높아 밑으로 배가 지나갈 수 있다. 다리를 건너면 도초항, 그곳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 반 바닷길을 가면 우이도의 돈목항에 도착한다. 항구 근처 마을의 새빨간 지붕의 집 중 하나가 민박집이다. 마당에는 주인장이 직접 잡은 생선이 빨랫줄에 널려있었다. 햇볕을 받아 물고기 눈이 살아있는 것처럼 부리부리했다. 화단에는 소나무 분재가 작은 숲을 이루었다. 저녁 식사 전 우리는 근처 도리산으로 잠깐 산책을 했다. 다양한 나무가 어우러져 자라는 숲에서 바람이 불 때마다 5월의 향기가 날아왔다. 작은 해변에서 철썩대는 파도가 숲속의 새소리와 화음을 이루었다.

민박집(우이수퍼민박) 마당에서 저녁을 먹을 때는 밤바람이 차갑고 새벽부터 달려와 피곤해서 음식 맛도 몰랐다. 밤새 뜨뜻한 바닥에 등을 대고 자고 일어나 싱싱한 태양 아래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안주인의 손맛이 특별했다. 마당 화덕 위 커다란 솥에서 모든 사람이 먹을 조갯국이 끓고 있었다. 울창한 산에서 나는 갖가지 나물과 해초로 된 반찬의 간이 딱 맞았다. 먼바다의 맛과 향기와 안주인의 인심이 더해 배를 흡족하게 채웠다.

두 개의 언덕이 감싸고 있는 돈목해변을 지나 산상봉(361m)으로 가는 산길은 대나무와 갖가지 나무가 무성했다. 조금 올라가다 뒤돌아보니 수평선에 아스라이 펼쳐진 흑산도가 보였다. 흑산도에서 귀양살이하던 정약전은 강진에 유배하러 온 아우 정약용이 두 번 바다를 건너게 할 수 없다고 우이도에 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흑산도 사람들은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마을 사람들과 격의 없이 지내는 이웃 정약전을 붙잡았다. 형제는 서신 왕래만 하며 그리워하다가 만나지 못했다. 형은 결국 소흑산도라 불리는 우이도에 왕래만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서울 사람 정약전은 외딴섬에 와서 무슨 생각을 하고 어디서 힘을 얻었을까.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 도착했을 때 자신을 지켜준다고 믿었던 천주님을 오히려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고 책(표해시말, 자산어보)을 써서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바다가 까맣게 보인다고 흑산도. 육지를 바라보며 동생을 그리워하는 정약전의 마음도 까맣게 타들어 갔을 것이다. 두 형제가 한 번도 보지 못할 정도로 멀었던 뱃길은 지금도 요원하다. 상산봉 정상에서는 우리가 도초도에서부터 우이도까지 온 뱃길이 한눈에 들어왔다. 푸른 바다에 초록색 점을 찍은 것처럼 섬이 흩어져 있었다.

민박집 근처 돈목 해변에는 바람이 만든 모래 언덕이 있다. 국내 최대의 해안 사구의 모래는 자꾸 흘러내려 점점 낮아지고 있어서 멀리 돌아가는 길을 만들었다. 모래는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언덕에 우아한 곡선을 그었다. 나는 우이도의 해안 사구에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사막 한가운데 있는 기분이 들었다. 출입을 금지한 척박한 모래 위에 갯메꽃이 수를 놓듯이 피어있었다.

우리는 사구가 보이는 해변에서, 얼마 남지 않은 섬에서의 시간을 즐겼다. 영화 주인공처럼 단단한 모래사장을 맨발로 뛰어 보았다. 친구가 파도 소리에 어울리는 음악을 들려주어 그 화음에 몸을 흔들어 보기도 했다. 모래가 젖은 발을 손처럼 부드럽고 따뜻하게 마사지해 주었다.

정약전은 한양에 있을 때부터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 섬으로 유배를 와서도 어부들과 친하게 지내고, 섬 여인과 결혼해서 두 아들을 얻었다. 벼슬을 하지 않았어도 그는 작은 섬나라에서 신앙을 지키면서 충만한 삶을 살았다. 섬은 끝까지 믿음을 지킨 인간의 열정이 피어나게 해주었다. 눈앞의 이익을 좇느라 신념이나 사랑 같은 정열은 헌신짝처럼 버리는 일이 별스럽지 않은 200년이 지난 지금의 세상에서, 섬은 어디서나 언제나 열정적으로 살아가라고 가르친다. 모래 언덕에서 바람이 불어와 오만가지 사유에 잠긴 우리를 부드럽게 간지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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