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뼈에 금이 간 줄도 몰랐다. 나무 뿌리 위로 털썩 넘어졌으니 앉을 때 불편해도 그러려니 했는데 병원에 가보니 의사가 당분간 등산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땅은 그곳과 인연을 맺은 사람 때문에 후세에 전해지는 것이지 단지 경치가 빼어나서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진실한 경치를 그린 최고의 풍경화가 강세황이 말했다. 그동안 건강과 시간, 무엇보다도 친구들이 있어서 가능했던 산행으로 산은 그녀의 역사가 되었음을 알았다. 그녀는 조선 시대 양반처럼 진경산수화를 바라보며 산 위에 올라간 기분을 대신했다. 그렇게 거의 1년이 지났다.
하지만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 시간은 강물처럼, 구름처럼 지나간다. 그리고 그녀는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설악산 등반을 준비했다. 장수대에서 대승령을 올라서 물이 줄지어 흐르는 십이 선녀탕을 따라 완만한 경사길로 내려오는 여정이었다. 설악산의 등반로 중 두 번째로 쉬운 코스라고 했다. 오르면 '크게 승리한' 기분이 들게 하는 대승령(大勝嶺)까지의 오름은 경사가 가팔랐다. 길의 양옆으로 수목이 빽빽한 산들이 자신감이 넘치는 청년처럼 버티고 있었다. 오랜 추위에 웅크리고 있던 나무와 풀들은 태양의 은혜를 갚으려는 듯 최선을 다해 잎을 내어 숲을 채웠다. 꽃으로 시작했던 봄의 부드러운 기운은 어느덧 여름 신록의 싱그러움으로 바뀌고, 뒤늦게 핀 꽃의 색과 향은 유난히 짙었다.
능선길에는 군데군데 피어오른 연분홍 철쭉과 앵초 같은 앙증맞은 풀꽃이 그녀의 일행을 반겼다. 보호 식물이라 함부로 캐지 못하는 관중이 관중처럼 환호하듯 퍼져 있었고, 작은 호리병 같은 병꽃이 고개를 숙이고 피었다. 완전히 다른 수종의 나무들이 얽히어서 서로를 지탱하며 자라고, 속이 텅 비었지만 가지 끝에 잎을 피워 살아있다고 말하는 나무들을 보며 그녀는 따뜻한 공생의 정을 느꼈다.
누군가 나무의 수명은 정해져 있지 않다고 하자 수다스러웠던 그녀의 중년 친구들은 잠시 말이 없어졌다. 오래 사는 것이 부럽지는 않지만, 나무의 길고 끈질긴 생명력이 신비하고 존경스러워 그녀는 수간(樹幹)을 은근히 쓰다듬었다.
설악산의 관능적인 계곡과 그 사이를 흐르는 물, 아기의 젖살처럼 뽀얀 바위가 투명한 물을 담고 있는 연못을 보니 요즘 읽는 도덕경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그녀는 프랑스어로 산(la montagne)이 여성 관사임을 떠올렸다. 그리고 산이 주는 양의 기운을 오랜만에 받고 그녀는 힘을 얻었다.
계곡의 신은 죽지 않는다
이를 일러 미묘한 모성이라 한다.
암컷의 갈라진 틈,
이를 일러 천지의 근원이라 한다.
면면히 이어져 오면서 겨우 있는 것 같지만
그 작용은 무궁무진하도다.
'계곡의 신'(谷神)은 계곡의 텅 비어 있음과 낮게 처하는 성질과 신처럼 세상 모든 곳에서 활동하는 도를 말한다. 노자는 계곡의 모습이 여성의 생식기와 흡사하다 하여 미약하지만 끊어지지 않는 생명력을 가진 도의 작용과 성질에 비유했다.
*최진석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복숭아 탕’이라고 불리는 하트 모양의 둥근 연못에 잠시 고인 물은 깊은 웅덩이에서 밑바닥을 하얗게 드러냈다. 그녀는 빠질 것처럼 눈이 시리도록 맑은 물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비슷하게 혹은 조금씩 다르게 모양이 다른 십이 선녀탕의 폭포와 웅덩이를 구경하느라 하산 길이 길어도 괜찮았다. 그리고 여름 산행의 백미인 탁족도 했다. 발을 담근 바위의 바로 앞에 물이 떨어지는 작은 폭포가 있었다. 그녀는 매끈한 돌 위를 미끄러져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갔더니 옆에서 누군가 위험하다고 소리쳤다.
그때, 그녀는 설악산에서 시리게 차고 맑은 폭포수를 맞으며 놀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났다. 설악산의 계곡은 서울 근처 계곡의 물과 달랐다. 그녀는 엄마가 수영복을 입고 계곡물을 맞으며 시원하다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녀의 엄마는 청결에 대한 기준이 높았다. 그래서 물의 상태를 믿을 수 없다고 한 번도 바닷물이건 시냇물이건 들어가지 않았는데, 한여름 설악의 물을 보고는 참을 수 없었나 보다. 산에서 어린이처럼 웃던 엄마가 그녀는 낯설었지만 귀엽다고 생각했다. '아주 깨끗한' 폭포 물을 맞으며 아이들과 놀던 엄마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르듯이, 그녀는 오늘의 산행에서 만난 나무와 꽃들, 폭포와 연못, 함께 한 친구들, 그들과 나누어 먹은 음식, 그리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소소한 이야기들이 어느 훗날 가슴 시리도록 생각날 것이다. 그 언젠가를 상상하니 그녀는 조금 쓸쓸해졌다. 설악산의 계곡은 그때도 지금처럼 씩씩하게 쏟아져 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