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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endipity

18산 가지산 (2019년 7월)

by Claireyoonlee

우리나라에는 4,440개의 산이 있다. 매주 몇 번씩 산을 오르내리는 친구도 아직 올라가 보지 못한 산이 많다고 했다. 산에 오를 때마다, 첩첩이 이어진 능선을 보며 걸을 때마다 우리는 산이 많은 나라에 산다는 사실, 황폐했던 산을 푸른 숲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여 지금 우리나라가 잘 사는 기반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하루하루 녹음이 짙어가는 요즘, 산에는 나무들이 기를 쓰며 뿌리를 내릴 자리를 찾으면서 촘촘하고 멀리 자라고 있다. 영남 알프스 자락의 가지산에도 짙푸른 나무가 산을 빼곡하게 덮어 정상에서 보면 넓게 펼쳐진 구릉이 녹색 평야 같았다.

토요일에 경상남도까지 가느라 정오가 다 되어 가지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산행 초반부터 경사가 급했고, 초록 잎사귀 사이로 여름 햇살이 칼날 같이 찌르며 들어왔다. 우리는 산바람이 불어오면 가만히 서서 땀을 식혔다. 들머리에서는 다른 높은 산봉우리 때문에 가지산 정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목표가 보이지 않으면 막연한 발걸음이 더 무거운 법이다. 가파른 경사길로 한참 오르고 준봉에 올라서야 꼭대기(1,240m)가 보였다. ‘경남 알프스’라 부를 만하게 사방에 1,000m가 넘는 산들의 능선이 포개져서 끝이 없었다. 낙동 정맥이 이루는 곡선은 가슴이 뭉클하도록 깊고 푸르게 남해를 향해 이어져 있었다.

가지산 정상에는 막걸리와 간단한 안주를 파는 ‘갤러리’ 주막이 있다. 우리는 주막에서 파는 ‘순희 막걸리‘가 왜 이리 맛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잔을 거푸 들이켰다. '지혜가 더해진' 가지산(加智山)의 술이라 그런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오른 정상에서 마시는 술이라 그런지 탄산이 많이 들어가지 않은 시골 탁주는 밥처럼 넘어갔다. 하지만 땀을 잔뜩 흘리고 난 후 높은 산 정상에서 마시는 막걸리가 맛있는 것은 당연하다. 점심을 오래 즐겨 하산 시간이 늦어진 것이 문제였다.

옛날에는 독실한 불교 신자가 오면 쌀이 나왔다는 전설의 쌀바위를 지나 산악회 버스 시간에 맞추기 위해 좀 빠른 하산 길을 택했다. 지름길로 내려오는 길은 가파르고 낙엽이 쌓여 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서두르다가 낙엽 더미에 미끄러져 넘어졌다. 나는 가볍게 엉덩방아를 찧었다고 생각했는데 옆에서 같이 가던 친구가 한번 굴렀다고 말하며 괜찮냐고 물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고 좀 창피해서 털고 일어났을 때는 아픈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중에 꼬리뼈에 금이 갈 정도의 부상임을 알았다. 꼬리뼈 부상은 약도 수술도 없어서 등산을 1년 정도 쉬었다.

흙에 벤 얼굴의 생채기에 바람이 불어 스치면 따끔거렸다. 산은 조금만 우습게 보거나 마음을 놓는 순간 냉정하게 경고한다. 그래도 귀경 버스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쉬지도 못하고 내려오는데 친구들이 산악회 버스를 포기하고 기차를 타고 가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포항에서 떠나는 KTX를 예약하고 오히려 시간이 남아 계곡에서 유유히 발을 담그고 놀았다. 계곡의 명랑한 소리를 듣고만 가는 줄 알았는데 차가운 시냇물에 발을 담그니 긴장이 풀려서 넘어지고, 다치고, 조바심 냈던 시간을 까맣게 잊었다. 버스를 그냥 보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serendipity'는 18세기 영국 작가 호레이스 월폴이 스리랑카의 동화 ≪세렌딥의 세 왕자≫에서 만들어낸 단어다. 행운이라 간단히 번역하기보다 ‘의도치 않던 우연히 얻은 경험이나 성과’라는 뜻이다. 오늘 우리가 오직 귀경 버스를 타는 목표에만 집중했다면 여유롭게 탁족을 하고, 뒤풀이 저녁 식사를 천천히 즐기고, 해 질 녘 절 입구의 평화로운 진입로를 산책하지 못했을 것이다. 버스를 놓치기로 하고 덤으로 얻은 추억이 바로 serendipity였다. 꼬리뼈 부상을 1년 동안 훈장처럼 달고 다녔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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