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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깨우치는 산

20산 금오산 (2020년 8월)

by Claireyoonlee

동양 사상에서 물은 생명의 생성과 소멸의 원천이다. 물이 있어야 생명이 나기도 하지만, 썩기 위해서도 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요즘 장마가 길어서 불편하기는 해도 자연은 생기가 넘친다. 특히 산에는 계곡마다, 혹은 계곡처럼 파인 곳으로 물이 거대한 물줄기를 만들어 떨어지면서 만물은 생성하고 소멸한다.


여자는 친구들과 비를 살짝 피해 남부 지방 구미의 금오산에 올랐다. 한때 전자 산업의 호황을 누렸던 지방 소도시는 금오산이 있어서 특별해 보였다. 해발 976m에 달하는 산에는 폭포와 절, 동굴, 마애석불, 돌탑까지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많아 산행이 많이 지체될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보통 들머리가 삼사백 미터 고도인데 이 산은 100m부터 시작이다. 폭포까지 오르는 케이블카가 있지만, 등산을 좀 한다는 그들은 타지 않았다.


대혜폭포는 물을 만나 물줄기가 굵고 하얗게 내려왔다. 아직도 올 비가 많은 듯, 습기 가득한 열대 우림 같은 숲에서 폭포로 가니 힘차게 떨어지는 물이 사방으로 튀어 더위를 식혀 주었다. 한동안의 가뭄 때문에 이름만 폭포인 적도 있었겠지만, 모처럼 만난 물로 계곡은 환희에 차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옆으로 살짝 난 좁고 험한 길을 가면 도선 대사가 도를 깨우쳤다는 도선굴이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었다. 동굴 옆 바위 위에서도 샤워 줄기 같은 물줄기가 흩어졌다. 낙동강이 굽이굽이 이어진 풍경이 보이는 산속 동굴은 지금도 칠흑 같은 어둠을 품고 세상을 내려다본다. 도를 깨우치기에는 너무나 속에 찌든 여자에게 도선 대사가 이르렀다는 도의 경지는 굴에서 내려다보이는 낭떠러지만큼이나 아득했다.


장자 1편 소요유 1장에 “곤이라는 물고기가 몇천 리인지 알 수 없는데 다시 붕이라는 새가 되었다. 붕은 한번 기운을 모아 날아오르면 날개가 구름같이 크다”라고 나온다. 도선 대사는 이 굴에서 도를 깨우쳐 붕처럼 날개가 큰 새가 되어 날았을까?


할딱 고개라 불리는 끝없는 계단을 올라가고, 또 한참을 찌는 듯한 더위를 이겨내며 올라갔다. 숲은 물을 가득 품어 생명은 있는 대로 물이 올랐지만, 습기 찬 공기를 마시며 열대 우림을 오르기는 고역이었다. 산행에 자신 있는 친구들도 땀을 쏟으며 얼굴이 상기된 모습을 보면서 여자는 함께 가지 않았다면 진즉에 포기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산길은 끊임없이 경사진 너덜길이고, 비에 젖어 미끄러웠다. 그들은 기암절벽이 아슬아슬하게 나무를 붙잡고 있는 풍경이나 등산로 입구의 호수를 포함한 구미시를 바라보며 잠깐씩 숨을 고르며 쉬었다.


정상이 보이는 즈음에 돌탑 무더기가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어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어린 손자를 그리워하며 쌓았다는 '오형돌탑'이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단단하게 쌓아 올린 탑들은 태곳적부터 존재해 온 것처럼 오래되어 보였다. 모든 인생은 다 슬프다. 하지만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슬픔보다 더한 슬픔이 있을까. 거의 1,000m 높이의 고지에서 이루어낸 한 인간의 솜씨보다 그 속에 담긴 그리움과 슬픔이 탑만큼 높아 그들은 잠시 침묵했다.


그곳에서 약사암으로 가다 보니 마애보살입상이 홀연히 나타났다. 돌의 모서리를 이용해 조각해서 입체적이라 현존하는 보살님처럼 보인다. 후덕하고 편안한 표정으로 신라 시대 이후 줄곧 이렇게 지치지 않고 서 있다. 보살님은 세상의 모든 모순과 불평등을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손을 펼쳐 위로한다. 누군가 가까이에서 이분을 모시는 듯 붉은 여름꽃이 화단에 정갈하게 피었다. 온 세상을 위해 한없는 사랑과 관용을 베푸는 성인의 기도에 응답하고자 여자도 고개 숙여 인사를 드렸다.


의상 대사는 발이 세 개인 황금빛 까마귀가 저녁노을 속을 날아오르는 모양의 금오산의 절경에 감복하여 도를 닦고, 깨우치고, 약사암을 세웠다. 현월봉 근처의 암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암자에서는 온화한 염불 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는 절에서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의상 대사의 마음 한끝을 공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산의 여정이 기다리고 있어 흔들다리로 이어진 정자를 바라보는 널찍한 바위에 누워 도를 깨우치신 분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높은 정상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여자의 존재를 확실하게 새겨줄 만큼 가까웠다. 큰 스님들이 도를 깨우치려고 거친 산꼭대기로 기어코 올라왔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세 발 달린 황금 까마귀의 모습을 닮은 산의 기운이 유난스러운지 어느 산행보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송전탑과 전신탑이 떡하니 자리를 잡은 현월봉에 올랐다가 잠시 숨을 고르고 하산하는 길에는 화전민들의 터 성안이 있었다. 해발 800m에 일구었던 마을은 사라지고 늪만 남아 고요하다. 초록색 이끼가 물 위에 퍼져 있고, 주변에 나무들이 줄기를 드리워, 요정이 툭 하고 나올 것 같았다. 새 한 마리가 무연히 날아올랐다.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길은 험했지만, 야단났다고 흐르는 계곡물이 하얗게 거품을 일며 떨어져 찌는 더위 속에서도 홀로 시원했다. 여름의 산행에서 탁족과 '알탕'은 아무리 바빠도 빼먹을 수 없는 일정이다. 팔복 더위 때문인지 지난 탁족 할 때보다 물이 덜 차가웠다. 저 위 현월봉에서 시작하여 약사암을 통해 오형돌탑을 지나고 도선굴을 보고 내려온 물은 혹사한 발가락 사이를 흘러 숨 가쁜 산행을 한 그들의 뜨거운 몸을 식혀 주었다. 큰 스님들만 도를 닦으시란 법은 없다. 평범한 그들도 고단한 일상을 통해, 긴 등반을 통해 양생의 길을 간다.


오강남은 ≪장자≫에서 “생명을 북돋는 일의 요체는 자연의 순리를 따르라는 것이고 상식 세계에서 벗어나 사물을 한 차원 높은 데서 전체적으로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 번의 산행으로 무슨 큰 깨우침을 얻겠냐마는 명산의 기운은 마음에 불을 지피고, 그 불은 꺼지지 않고 그들의 정신을 밝혔다.


돌아오는 버스 창밖으로 온종일 이글거리던 태양이 떨어지는 광경을 보았다. 태양은 불꽃처럼 타오르더니 그 여운을 황홀한 색으로 남겼다. 세 발 달린 황금빛 까마귀가 산 위로 날아오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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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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