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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룬 시공간은…

22산 북한산 둘레길 14, 15, 16, 17 (2020년 9월)

by Claireyoonlee

사회적 거리 두기로 우울증이 심각하다. 그동안 자주 있던 모임이 없어지면서 아무리 내향적인 사람이라도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아닌가. 그래서 대학 동기 친구 몇 명이 북한산 둘레길을 걷다가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코로나 블루를 겪고 있는 친구들을 응원하는 영상을 만들기로 했다. 왕년의 응원 단장이었던 친구가 학교 응원가에 맞춰 율동하고 구호를 외치는 짧은 콘티였다. 사금파리같이 빛나던 젊은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응원가 ≪아파트≫에 맞추어 친구는 온몸을 뻗어 열정적으로 춤을 추었다. 거리두기를 지키는 것처럼 다른 한 친구가 멀찌감치 따라오며 함께 했다. 또 한 친구는 음악을 틀고 나는 그들을 촬영했다.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핸드폰을 든 손이 떨려 화면이 살짝 흔들렸다. 다행히 아무도 지나가지 않아 우리는 산을 독무대로 삼아 진행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마침내 짧은 동영상을 완성했다. 친구들을 위로하기보다 우리 자신을 위로하는 놀이였다.

우리는 영상을 제작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품고 지난번 18길을 시작했던 도봉산역에서 17길을 시작하여 16, 15, 14길을 완주했다. 17길 다락원길과 16길 보루길, 15길 안골길은 인가와 차도가 많아 비교적 평이하지만, 14길 산너미길은 사패산 능선까지 올라가야 하므로 쉽지 않았다. 게다가 ‘촬영’으로 시간이 지체되어 오후에는 비를 맞으며 해가 넘어가 어둑해진 산을 겨우겨우 내려왔다.

서울의 외곽 마을은 시간을 거스른 정감 있는 낮고 허름한 주택으로 이어져 있다. 초가집 공방의 지붕에서는 싹을 틔운 벼가 자다 일어난 소년의 머리칼처럼 삐죽삐죽하게 저절로 자라고 있었다. 인상 좋은 주인장이 일하다가 나와서 땀내 나는 우리 손에 박하 잎을 한 가지 따 주었다. 손에서 스피아민트 껌 같은 날카롭고 시원한 향기가 났다.

15길을 들어서면 의정부시가 나타난다. 새로 조성된 아파트 단지 옆 직동 공원이라는 말끔한 공원이 둘레길과 연결되어 있다. 은평구 쪽처럼 산을 가로막는 고층 아파트는 아니어서 다행이지만, 그래도 북한산과 어울리는 마을을 만들었으면 더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시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쌍둥이 중 한 사람이 화성에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면 같은 날 태어난 두 사람의 나이는 달라진다. 그리고 지구에서도 완벽하게 맞는 두 시계를 고층 건물 일 층과 꼭대기 층에 두면 시간이 달라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각하는 ‘정확한 시각’이라는 개념은 없으며 '시공간'으로서 시간의 지속성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짧은 영상을 만들면서 호흡이 척척 맞고 배꼽이 빠지게 웃었던 것은 같은 학교에 다니고 같은 응원가를 부르면서 보냈던 지속된 시간을 공유해 감정 구조가 통했기 때문일까. 우리의 시공간은 북한산 둘레길 중간 어디선가 기름지게 흘러 과거와 현재는 기적처럼 이어졌다.

로맨스가 가미된 SF영화 ≪클라라≫는 마무리가 황당했다. 그래서 엔딩크레딧을 끝까지 생각 없이 바라보다가 젊은 감독이 말하려는 진실이 바로 그 마무리에 있음을 알았다. 데이터를 통해서만 지적 생명체가 사는 별을 찾는 남자와 직감으로 별을 찾는 여자가 모든 면에서 부딪히지만 결국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여자는 죽고, 남자는 몇 달 뒤 200광년 떨어진 행성에서 여자가 보낸 메시지를 받는다. 그녀와 함께 들었던 Bob Dylan의 노래(girl from the north country) 파일과 함께.

명문대 가려고 기를 쓰고 공부했고, 대학에서는 중고등학교 때 놀아보지 못한 한을 채우려 열심히 놀았고, 아이들을 잘 키운다고 지금 보면 쓸데없는 수고였지만 최선을 다했다. 잠시 잡았던 교편, 식구들 밥을 해주며 짬짬이 읽은 책들, 여행, 외국 생활…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아름답기도 한 우리 인생사는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어느 먼 별로 확대되어 재생되는 것일까. 함께 응원가를 부르고 응원했던 젊음의 시간이 북한산에서 깔깔거리며 보낸 중년의 시간과 중첩되어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로 연결되었듯이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심란한 시국이나 사사로운 근심거리 따위는 까맣게 잊었다. 비가 조금씩 오는데 산너미길을 강행하다가 널따란 코끼리 바위에 이르렀다. 우리는 보슬비를 맞으면서도 널찍한 바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다리는 무겁고 옷은 젖는데도 산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향긋해서 한참을 누워 있었다.

9월의 하루 시간이 기적처럼 흘러갔고, 그 속에서 또 나의 일부가 형성되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얽힘 같은 과학이론이 구름이 걷히는 것처럼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어차피 그들도 잘 이해하지 못한 이론이었으니까 나도 그 정도만 이해하면 될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Je4Eg77YSSA&ab_channel=BobDylanVE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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