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산 사천 와룡산 (2021년 1월)
서울은 연일 수은주가 0도 이하로 내려간다. 하지만 차를 타고 한참 내려간 남쪽 지방은 포근했다. 겨울 산행이라 할 수 없을 만큼 햇볕이 따뜻해서 동화 ≪해님과 바람≫의 나그네처럼 옷을 하나씩 벗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더위로 등반이 힘들었다. 벗은 겨울옷이 무거웠고, 보통 어느 정도 올라가서 정상으로 오르는데 이번에는 거의 바닥에서부터 800m의 봉우리로 올라가야 했다. 둘러 가는 에움길이 아닌 정상으로 곧게 난 산길은 가파르고 험했다. 그리고 등산이 오랜만이라 정상에 올랐을 때의 환희를 잊고 있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올라가니 지천으로 깔린 돌을 누군가 주어 정성스럽게 쌓아 만든 탑이 근사했고, 가까이서 보면 밍밍한 사천시의 전경도 그윽하고 아름답게 펼쳐졌다. 먼지 때문인지 분명하지 않은 흐릿한 남해와 그 위에 봉분 같은 섬이 점점이 흩어져 있는 풍경을 나로서는 표현하기 어려웠다.
김훈 작가는 기행문에서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을 ‘관능적’이라고 표현하기를 좋아한다. “서해의 밀물이 들어오면 강들은 하구를 열어서 바다를 받는다”라고 ≪라면을 끓이며≫에서 말한다. 그리고 작가는 “산맥과 바다가 붙고 엉키는 조국산하의 관능을 느낀다. 압록강은 이 관능의 북단이다.”라고 했다. 와룡산 정상에서 본 능선과 한려해상 국립공원과 도시 외곽의 들판은 작가의 표현대로 산과 바다와 섬이 '붙고 엉키는 조국 산하의 관능'이었다. 나는 와룡산 제일 높은 봉우리 새섬봉에서 왜 작가가 우리 땅을 ‘관능’이라고 표현했는지 이해했다.
또 다른 높은 봉우리 민재봉을 향한 능선을 걷는 내내 나뭇잎이 다 떨어진 나무 사이로 상록수가 가득한 산과 푸른 바다까지 보였다. 바닷바람이 가끔 짠내를 품고 불어왔다. 길가에는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낮은 덤불들이 빽빽했는데 진달래라고 했다. 진달래꽃이 피어나 선홍빛으로 물든 산등성이를 상상해 보았다. 이번 겨울이 아무리 춥다고 해도 봄은 올 것이다. 진달래 관목은 우리에게 겨울 한 가운데에서 봄을 꿈꾸게 했다.
백천사로 하산하는 길은 흙길과 너덜길이 번갈아 나왔다. 위험한 곳에는 친절하게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흙이 말랑말랑해져서 걷기 좋았다. 땅은 서서히 새로운 생명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상에서 본 사천시는 통합 이전에는 삼천포시였다. 예전에는 서울에서 진주를 거쳐 삼천포를 기차를 타고 가다가 깜빡 졸면 종점인 삼천포까지 가기도 했다. 그래서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이 나왔다. 삼천포가 고향인 한 친구가 “우리 고향에도 극장은 있었어.” 하고 말했다. 그만큼 경상남도 끝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최남단 도시는 외지고 개발에 밀렸다. 그러나 이제는 볼거리가 많아 “빠지고 싶은 곳”이 되었다. 거기다가 그들의 동네 산인 와룡산은 글자 그대로 용이 누워있는 기품있는 모양으로 썰렁한 도시까지 그럴듯해 보이게 한다.
와룡산을 뒷배로 한 백천사는 으리으리하다.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절이 지나치게 화려해서 거부감이 들지만, 세월이 지나면 유물이 될 것이다. 교회나 성당은 화려하게 지어도 그러려니 하면서 절이 크고 번쩍거리면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놀며 놀며 내려와 버스 시간이 촉박했던 이유도 있지만 거대한 절에 선뜻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 겉으로만 훑어보았다. 절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금동 와불상이 있다고 했다. 와룡산과 합을 맞추려 했을까.
오고 가는 시간이 산행 시간보다 길었지만, 봄을 미리 느낄 수 있었고 ‘관능적’인 풍경을 실감했으니 만족이다. 그리고 온종일 누워있는 용의 등을 타고 섬이 널린 바다를 구경하지 않았는가. 귀경해 버스에서 내리니 쌩한 겨울바람에 뺨이 시려서 계절 감각이 돌아왔다. 북쪽은 아직 겨울이 한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