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산 축령산 (2020년 12월)
꽃 같은 애정보다 상록수 같은 우정인데 걔는 애인이 생겼다고 우리는 잊었다냐? 친구가 투덜거렸다. 아주 오래전, 우정보다는 애정에 관심이 많았던 젊은 시절의 이야기다. 누구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한참 연애에 빠져 다른 동성 친구들에게 소원해진 누군가를 흉보는 친구의 비유가 신선했다. 그때는 그냥 웃어넘겼는데 앙상한 나무들 사이에서 푸른색이 등등한 소나무를 보면 가끔 “상록수 같은 우정”이라고 힘주어 말하던 친구가 생각난다.
우리 아파트 앞 정원의 소나무는 한겨울에도 창문을 열 때마다 늘 푸른 기운을 전해 준다. 나는 좁은 아파트 마당에서 뿌리를 내리고 꿋꿋하게 초록빛을 발하는 나무를 보며 응원한다. 제발 잘 자라라. 잘 자라라 하고.
세한도 한쪽에 장무망상(長毋忘相)이라는 낙관이 있다. '오래도록 잊지 말자'라는 뜻이다. 당대의 천재 문인 추사 김정희도 상록수를 보고 변하지 않는 우정을 떠올렸다. 그는 고향에서 신동이라고 대접받고, 임금과 여러 문인의 추앙을 받다가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져 제주에 유배 갔다. 지금처럼 비행기로 한 시간에 가는 제주가 아니라 몇 날 며칠을 가야 하는 섬이었다. 가족, 친구, 제자 그가 아끼는 사람들이 자신을 잊을까 걱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존경하는 제자 이상적은 스승을 잊지 않고 중국의 서책을 보냈다. 그리고 추사는 제자의 용기 있는(유배 간 죄인을 돌보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정성에 답하여 세한도를 그리고 감사하는 글을 썼다. 제자는 그 문인화를 추사를 만나기를 오매불망 고대하는 중국의 학자들에게 보였다. 그들은 정성스럽게 꼬리를 물어 답문을 썼는데 무려 14m나 된다. 국경을 건너서 오고 간 나눔은 진정한 지성의 교류였다.
세한도는 이상적으로부터 여러 번 주인이 바뀌어 결국 우리나라의 소유로 온전히 돌아왔다.
이상적-> 제자 김병선-> 아들 김병학-> 아들 김준학(두루마리로 만들고 자신의 글도 끼워 넣었다)-> 민영희-> 민규식-> 후지츠카 치카시-> 소전 손재형-> 개성부자 손세기-> 아들 손창근-> 국립 중앙 박물관
김준학이 엮은 긴 두루마리는 소나무와 잣나무, 그리고 소박한 집 한 채로 시작한다. 그림은 문자기(文字氣)*만 가득하다. 그리고 당대의 명필들이 쓴 그림보다 더 그림 같은 글씨가 서로 다른 멋을 풍기며 펼쳐진다. 한문을 영어를 이해하는 정도로만이라도 읽고 이해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유려한 필체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겁고, 친절하게 번역한 댓글 하나하나에 담긴 그들의 진심이 찌릿찌릿하게 전해졌다.
장성 축령산은 편백 나무가 가득해 겨울 산 같지 않게 푸르렀다. 온 나라의 산이 가난과 전쟁으로 벌거벗었을 때, ‘대한민국 조림왕’ 임종국님은 나라를 구하려면 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신념과 희망을 품고 나무를 심었다. 그는 살아생전 여의도 두 배 가까이 되는 땅에 숲을 만들었다. 앙상한 가지만 남아 누렇게 바랜 겨울 축령산에 키가 큰 삼나무와 편백 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고 푸르게 자라고 있다. 숲으로 들어가면 초록빛 가는 잎사귀와 늘씬한 나무줄기가 내뿜는 향기가 귀부인의 향수처럼 은은하게 풍긴다. 우리는 숲 안에 그림처럼 놓여있는 벤치에 앉아 가만히 숲의 소리를 듣고 향기를 맡았다. 한 친구는 폴란드의 숲이 생각난다고 했다. 그곳의 숲은 헨젤과 그레텔이 찾아간 과자로 만든 집이 정말 있을 법할 정도로 울창하다고 했다. 전라남도 장성에서 한 사람이 나무가 빽빽한 숲을 꿈꾸었고, 그 꿈을 이룬 숲에서 우리는 가보지 않은 유럽의 동화 같은 숲을 상상할 수 있었다.
나는 축령산을 꽉 채운 상록수를 보고 국립 미술관에서 본 세한도의 송백(松柏)이 떠올랐다. 추사는 제자의 변하지 않는 사랑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했으니 '상록수 같은 우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귀한 복이다.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진 이후라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혹은 측백나무)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고 하였다. 송백(松柏)은 사철을 통하여 시들지 않는 것으로서, 세한 이전에도 하나의 송백이요, 세한 이후에도 하나의 송백이다. 성인이 특히 세한의 후에 그것을 칭찬하였는데, 지금 그대는 전이라고 더함이 없고 후라고 덜함이 없구나. (세한도 글 중에서)
옛 친구의 우스갯말처럼 애정은 꽃이라 금세 져서 허무함만 남기지만, 우정은 늘 푸른 나무 같아 두고두고 위안을 준다. 우리는 내려와서 시골 탁주와 투박한 숨두부(순두부 방언)를 나누어 먹었다. 나는 친구들과의 우정도 편백잎처럼 언제나 푸르게 빛나기를 바라면서 세한도 같은 대작은 아니지만, 이 허접한 글로 그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평소의 학문적 소양이 서화에 발현되는 기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