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산 대야산 (2021년 2월)
고속도로를 벗어나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한참 들어가니 산을 등지고 모여있는 개량식 한옥 마을이 수려하고 점잖았다. 윤택한 마을 앞 들판에는 인삼밭이 가지런했다. 멀리 흐린 하늘 속에 어렴풋이 보이는 대야산 정상이 신선이 사는 곳처럼 아득하게 높아 보였다.
절도, 집 한 채도 없이 외로운 대야산 산속에는 길게 뻗어 내린 용추 계곡이 산의 유일한 벗이다. 삭막한 겨울 산이 녹지 않은 눈으로 얼룩덜룩했다. 계곡은 눈이 쌓여 있거나 꽝꽝 얼어서 하얀 융단이 깔린 미끄럼틀처럼 매끈했다. 가만히 밟아보니 포근한 날씨인데도 얼음이 두꺼웠다. 그래도 귀를 기울여 보면 얼음 밑으로 물이 재잘대며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용추폭포는 쏟아지다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여름에는 시원한 물줄기가 푸르렀을 텐데 겨울 동안 투명한 얼음이 겹겹이 얼어버린 폭포는 무시무시한 하얀 용 같다. 이 물이 어는 순간이 언제였을까 궁금하다고 친구들에게 물었더니, 내려오는 물이 조금씩 얼고 또 얼면서 얼음 폭포가 된다고 했다. 도시에서는 끊임없이 내뿜는 열기 때문에 겨울이 되어도 진정한 얼음을 보기가 어려운데, 한순간도 녹지 않고 얼어버린 물에서 영하의 추위를 견딘 산의 시간을 엿보았다.
힘들게 931m의 정상에 올라가서도 시계가 흐려서 백두대간 능선을 잘 보지 못했고, 예상보다 시간이 촉박해 서둘러 내려오다가 철퍼덕 넘어졌다. 뛰어서도 잘 내려왔다고 자만한 순간이었다. 옷이 온통 진흙투성이가 되었지만, 근육이 울퉁불퉁한 용 같은 얼음 폭포 하나를 보는 것만으로도 완벽한 산행이었다.
비슷비슷한 산을 뭐하러 자주 가냐고 묻는다면 산마다 다른 매력과 멋을 발견하기 위해서라고 답하겠다. 산은 저마다 가진 매력이 다양해서 힘겹게 산행하는 사람들에게 감탄과 경이를 선물한다. 대야산은 얼어붙은 폭포 하나만으로도 넘치게 매력적이었다. 또 어떤 산에서는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떨어질 것 같지만 떨어지지 않는 바위가 인상적이다. 가끔 우리는 “저 바위 누가 올려놓은 거야?” 하고 묻는다. “응 내가 너희들 보라고 어젯밤에 올려놓느라고 힘들었어.”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누군가 대답한다. 얼음 폭포를 보면서도 이 작품이 과연 어떻게, 어느 순간, 어떤 힘이 만들어냈을까 궁금하지만, 누군가 지난밤 만들었다고 말하며 넘길 수밖에 정답을 아는 사람은 없다.
≪만들어진 신≫의 작가 리차드 도킨스가 신을 부정하는 변론은 안쓰러울 정도다. 그는 우리가 산행하면서 궁금하고 감탄하는 모든 현상과 대상에 관해 ‘자연 선택’이라고 단정한다. 그리고 신을 ‘지적 설계자’로 칭하면서 창조론자에게 묻는다. 그럼 지적 설계자는 누가 설계한 것인가? 작가는 생물학자이고 철저한 다윈주의로서 과학적 증거가 없으면 믿어서는 안 된다는 이성주의자이다. 이 세상의 그 많은 종교인이 잘못된 믿음을 가졌다고, 집단 망상에 빠진 것이라고 필사적으로 주장한다.
가톨릭 신자로써 신에 대한 불경(blasphemy)을 저지르는 독서가 불편했고, 조금 흔들렸던 것도 사실이다. 사실, 작가가 제시한 무신론의 증거는 무궁무진해서 이성으로 반박할 길이 없다. 뇌과학과 양자 물리학이 매일 매일 새로운 과학적 사실을 보여주고, ‘다중 우주 이론’까지 설득력을 얻고 있는 이 세상에서 신은 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
게다가 역사를 돌이켜 보면 종교는 인류에게 끼친 해악이 많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유를 박탈하고, 기본 권리마저 인정하지 않아 심각한 인권유린이 일어나기도 했다. 코비드 19 바이러스 방역에도 일부 종교 단체가 지나친 신앙심 때문에 지탄받았다.
그러나 이 작가는 다른 트랙을 달리는 바퀴 같아 보인다. 우리가 경험한 신비한 체험, 마음속의 비밀스러운 믿음, 입이 떡 벌어지는 자연 앞에서 느끼는 벅찬 감동 등은 아무리 '과학적', '논리적', '효율적'으로 설명한다 해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리차드 도킨스는 유신론자를 무신론자로 설득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 아직도 주일이면 감염을 무릅쓰고 교회나 성당을 가고, 산에서 진기한 풍경을 보면 조물주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이유는 또 무엇일까. 작가는 '집단 선택'이나 뇌의 한 부분의 이상이라고 주장하겠지만.
창조주가 만들었든지, 자연 선택으로 인한 복잡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든지 산은 항상 무심하게 저마다의 매력을 발산하고, 우리는 그 신비를 보고 느끼려고 산을 오른다. 그리고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풍경에 감탄하고 그 감동을 가슴 깊이 새겨놓는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구시렁댔던 갈릴레오처럼 나도 조그맣게 말한다. '분명 누군가 계신거야.'하고. 리차드 도킨스는 실패했다. 분명 무지하고 맹목적이라 비난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