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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 성모 성지에서

by Claireyoonlee Feb 0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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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천주교인 순교자 이야기는 언제, 누가 들어도 애달프다.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조선 말 병인박해(1866) 때 이 지역에 박해를 피해 숨어있던 많은 천주교인은 남양도호부에 잡혀 와서 참수당하고 사형당했다. 김 필립보, 박마리아 부부, 정 필립보, 김홍서 토마, 네 분의 이름만 기록에 남았을 뿐 돌아가신 순교자의 이름은 물론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알 길이 없다. 그래서 다른 순교자 터와 달리 늦게서야(1984년) 성지가 되었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이 가혹한 형벌을 받고도 굴하지 않고 장렬하게 죽음을 택했다. 우리는 모두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다. 하지만 순교자가 받은 고통과 죽음에는 생로병사의 사(死) 이상의 애통함과 신성함이 있다.


비록 늦게 성지가 되었지만, 남양은 우리나라 최초의 성모 성지가 되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위스 건축가가 설계한 대성당, 20세기의 미켈란젤로라 불리는 이탈리아 화가의 제대 위 성화와 고상, 로마네스크 시대(1426년)에 조각된 소성당의 십자가상 같은 위대한 작품이 순교자의 순결한 넋을 기리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고요하게 위로하고 있다. 세계 3대 성모 발현 성지에 가보았지만, 남양 성모 성지에 들어서자 나는 기적처럼 완전하게 평화로웠고, 감사하는 마음이 가슴이 벅차도록 차올랐다. 수십 년 동안 신부님이 들인 정성 때문인지, 대가들의 순수한 열정 때문인지, 흔들림 없이 꼿꼿했던 신앙을 지킨 선조들의 영혼 때문인지 모르겠다. 살아있거나 이 세상을 떠난 가장 순전한 영혼의 힘이 결집한 ‘작품’이기 때문일까.


화강암으로 만든 공 모양의 묵주 알이 1km가량 이어지는 20단 묵주기도 길 중 환희의 신비길은 공중에서 보면 블라디미르 성모(자비의 성모) 이콘을 우연히 신기하게 닮았다. 묵주 알을 굴리듯이 공 하나 공 하나를 찾아 묵주기도를 하며 걷다 보면 붉은 벽돌 60만 장으로 지은 대성당의 높은 두 개의 기둥 앞에 선다. 계곡 사이에 절묘하게 자리 잡아, 문을 들어오면 바로 이 두 개의 기둥이 보여서 성당을 찾으러 지도를 따로 볼 필요가 없다. 스위스 루가노에서 마리오 보타가 건축한 은행 건물을 본 적이 있는 이상각 신부님은 이 건축가에게 대성당 건축을 맡기고 싶었다. 건축을 의뢰하면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 바쁜 건축가는 성지의 성당 건축은 흔쾌히 몇 달 만에 수락했다. 그리고 그는 스위스 주택 하나를 설계할 비용만 받고, 천국에 가도록 기도해 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이미 22개 이상의 성당을 건축했던 그는 “19세기 중반 조선 시대 때 저질러진 천주교도 학살 사건을 기리는 장소를 물리적으로 변형함으로써 추상적이거나 이상적으로 행동하는 대신에 구체적으로 행동하겠다는 각오”로 대성당을 세웠다.


성당 뒤쪽에 있는 파이프 오르간 반주(마리오 보타는 뒤에서 들리는 소리가 “소리 이상의 소리, 생명을 주는 소리”라고 말했다)에 맞춰 부르는 마침 성가로 주일 미사가 끝나자, 신부님은 신자들에게 제대 위에 올라와 쥴리아노 반지의 성화 뒷면을 보라고 했다. 예수님이 베푸는 마지막 성찬에 있는 동서양 사람들의 뒷모습은 앞모습과 사뭇 달랐다. 그들은 서 있거나 뒤꿈치를 들고 있어 다급하고 불안해 보였다. 그 뒷모습에서 인간의 어리석음과 교만함이 배어있어 나는 괜스레 부끄러웠다. 천사를 만나서 잉태하시고 엘리자베스를 찾는 성모님의 뒷모습에는 가벼운 설렘과 평화가 고요히 흘렀다. 제대 위 십자가에는 돌아가셔 고개를 떨군 예수님이 아니라 아직 살아계신 예수님이 성당을 들어서는 사람과 눈을 맞추신다. 두 기둥의 천창에서 내려오는 빛을 받아 형형하게 빛나는 예수님의 눈을 마주치고 나는 기도하는 손을 다잡았다.      


별 이유 없이 오랫동안 냉담 신자였다가 미국에 살러 갔을 때였다.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기에 개신교 교회가 가톨릭 성당보다 낫지 않을까 하는 세속적인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꿈속에 아름답고 우아한 여자분이 나타나 “너는 성당밖에 갈 곳이 없어”라고 야단치듯이 말했다. 딱히 당신이 성모님이라고 밝히지 않았지만, 나는 놀라서 잠에서 깨어서는 성모님이 성당을 다니라고 인도하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주저 없이 성당에 가서 견진 성사를 받았고, 6년 동안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매일 미사를 드리고, 레지오마리에 같은 봉사 활동을 했다. 그래서인지 낯선 땅에 옮겨가 방황하던 사춘기 소년이었던 아들들도 잘 크고, 신앙으로 끈끈하게 이어진 보석 같은 친구들이 생겼다. 제대의 한지 벽이 푸른 섬광을 발하는 1층 소성당에는 남양 성모 성지의 성모님이 계셨다. 나는 하얗게 미소 지으며 두 손을 벌리고 있는 성모님을 보고 바로 꿈에서 본 아름다운 분을 떠올렸다. 소년 예수님이 성모님의 치마를 단단히 부여잡고 있었다. 평범하고 소박해서 더욱 거룩한 모습이었다. 한복 비슷한 긴 원피스를 입고 쪽을 진 머리가 아닌 평범하게 올린 머리를 한 성모님은 다소곳하게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주교님은 “여러분도 예수님처럼 성모님을 꼭 붙들고 언제나 성모님의 보호와 사랑을 받기를 원한다고 말씀드리기를 바란다”라고 남양 성모님을 본 감회를 이야기했다. 나는 오래전 꾸었던 꿈이지만 아직도 생생한, 꿈에서 뵌 성모님을 남양에서 만났다고 생각했다.


“자네의 시작은 보잘것없었지만, 자네의 앞날은 크게 번창할 것이네” 욥의 친구 빌닷은 절망에 빠져 과격해진 욥을 이렇게 위로한다. 이상각 신부님은 위기가 있을 때마다 욥처럼 이 말씀을 수십 년 동안 되새겼을까. 3,000평에서 시작한 성지가 33년 만에 거의 3만 평에 이르기까지 신부님이 들였던 노력과 고생한 이야기는 직접 집필한 두툼한 책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에 담겼다. 하지만 그 길고 모질었던 시간을 글과 사진으로 담기에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 도저히 성공하지 못할 것처럼 보였던 일들이 차곡차곡 진행되었던 것은 한 인간의 집념 이상의 간절한 기도와 보이지 않은 응답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친정 어머니와 가을을 맞이하면서 찬란하게 빛나는 성지를 천천히 걷고 미사를 드렸다. 이 땅에 날 태어나게 하고, 키워주었고, 아직도 든든한 기둥처럼 내 삶의 한편을 받쳐주고 있는 엄마 옆에, 꿈에 나타나서 길을 인도해 주신 또 한 분의 어머니가 계셨다. 그리고 나는 가끔 한눈을 팔아도 그분의 치맛자락을 꼭 붙들고 살았음을 알았다. 적요한 가을 햇볕이 내리는 성지 마당에는 순교자의 피처럼 붉은 단풍나무가 불꽃처럼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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