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아들들과 그 엄마의 미국 학교 적응기
결혼하자마자, 유학 중인 남편을 따라가서 플로리다의 작은 도시에서 살았다. 만(bay)을 접하고 있는 그곳은 2~3개월 정도만 쾌적하고, 나머지 날들은 열대의 태양과 끈적한 습기로 숨이 막혔다. 20대의 나는 평화롭다 못해 지루하고 느린 미국 시골에서 견디기 힘들어서 3년 남짓 머무르면서 갓난아이를 데리고 자주 한국을 방문했다. 두 나라 어디선가 어중간하게 걸쳐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15년 후 다시 미국의 수도 워싱턴 디씨 근처 북버지니아로 떠나면서, 이번에는 한국에 고개를 돌리지 말고 미국 생활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그것도 거의 20년 전의 일이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사춘기 열병을 앓고 있었던 아이들은 중학교에 들어가서 맘대로 쏘다니면서 성적은 엉망이었다. 나는 말 잘 듣고 재롱을 부리던 사랑스러웠던 아들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공부에 관심 없는 그들의 앞날이 캄캄하다고 생각했다. 탈출구가 필요했다. 미국 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자유롭게 자기만의 길을 갈 수 있을 거라고 꿈꾸었다. 엄마란 자기 자식에 대해 허황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법이니까. 마침 남편이 미국 지사에 발령 날 기회가 있어 나는 내켜 하지 않는 남편을 부추겼다. 한국에서의 회사 생활에 만족하고 있어 떠나고 싶지 않았던 그도 아이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고 싶었는지 적극적으로 발령을 신청했다. 드디어 우리는 대망의 꿈을 안고 비행기를 탔다.
모든 문제가 미국에만 가면 해결되리라는 기대는 얼마 가지 않아 무너져 내렸다. 갑작스럽게 환경이 변한 7학년, 9학년 남자아이들은 다시 방황했다. 한국을 그리워하고, 영어를 쓰려하지 않았다. 학군이 좋은 중상층 주거 지역의 공립학교에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아이들끼리의 이너서클이 있었다. 공부만 하는 한국 아이들은 공부만 하고, 내 아들들처럼 공부에 관심 없는 애들끼리 모여 친구가 되었다.
대중교통이 없어 친구 집밖에 놀러 갈 곳이 없는 아이들은 답답해했다. 어쩌다가 차 있는 친구를 따라 코리아 타운 같은 곳으로 멀리 가면 아이가 돌아올 때까지 불안했다. 마당에 두 그루의 벚나무가 이층 높이까지 뻗어 있고 초록색 덧창문이 있는 그림 같은 집에서 나는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깨우기 위해 소리소리 지르고, 잠이 덜 깬 아이들에게 도시락을 들려 학교에 데려다주었다. 봄이면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떨어지는 벚꽃을 보며 감상에 빠질 틈도 없었다.
미국 학교는 엄격했다. 한국에서는 그 나이 남학생이 할 만한 일(수업 시간에 졸기 같은)이라도 미국 학교에서는 큰 문제가 되었다. 나는 전화기에 학교 번호가 뜰 때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상담하러 오라고 해서 불려 가면, 안되는 영어로 선생님과 이야기하느라 애를 먹었다. 어떤 때는 말하다가 눈물이 왈칵 나왔다. 선생님은 당황하면서 나를 위로했다. 그들은 먼 나라에서 갓 온 아이를 이해하지 못했고, 집에 문제가 없는지 궁금해했다. 그들의 선의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낯선 환경으로 옮겨온 미숙한 사춘기 소년을 이해하지 못하는 백인 선생님이 원망스러웠다.
한국에서 느꼈던 두려움과는 종류가 다른 두려움이 늘 나를 압박했다. 도망치듯 미국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왔는데 별로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문제가 커졌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3년을 보냈다.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밤에 몰래 나간 아이를 찾으러 간 적도 있고, 피아노 레슨을 가지 않겠다고 도망간 아이를 찾으러 온 동네를 돌아다닌 적도 있다. 내가 정신없이 아이를 찾으러 다니는 걸 본 백인 아줌마가 자기도 돕겠다고 했다. 결연한 표정을 짓고 도움을 베풀겠다는 그녀의 호의를 사양하면서 나는 자존심이 상하고 서글펐다. 모범생으로 평생 살아 온 나에게 내 자식의 일탈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돌이켜보면 나는 아이들보다 내 자존심을 지키기에 급급했던 것 같다. 성적이 나쁘고 반듯하게 어른 말을 따르지 않는 애들이 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애들이 이 사회에서 먹고 살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어떡하나 전전긍긍했다. 아는 사람의 아이들은 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부모 말을 잘 듣는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이들을 탓하다가도 내가 무언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에 빠졌다. 거의 밑바닥을 친 절망의 시기였다. 아주 깊이 떨어졌던 것일까. 조금씩 실낱같은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큰 애는 좋은 선생님을 만나 그림을 그리면서 마음을 잡았고, 학교 공부를 따라 하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나는 그 애가 그린 그림을 보고 놀랐다. 1년 동안 자기만의 주제를 정해 그리는 프로젝트 수업에서 아들은 ‘surveillance’(감시)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제법 사회문제가 있는 주제를 그림으로 표현한 능력이 놀라웠다. 성조기의 50개 별을 눈알로 그리거나,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는 거대한 눈알 같은 카메라를 그렸다. 인정(認定)에 굶주렸던 아이는 작품을 인정받고 칭찬을 받자, 진중하고 성실해졌다.
작은 아이는 피아노를 잘 쳤다. 다른 공부는 하지 않아도 매일 어김없이 30분 피아노 연습을 했다. 나는 그 시간 동안 어느 피아니스트가 연주할 때보다 더 심취해서 들었다. 아이를 데리고 콩쿨에 나갈 때마다 가슴을 졸이며 지켜보았다. 상을 받으면 엄마와 아들은 가슴이 벅찼다. 그리고 아이는 고학년이 되자 정신을 차리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안 하던 공부를 하느라 힘들어했지만, 서서히 성적이 올랐다. 나는 미술학원과 피아노 학원을 데리고 다니느라 몇 시간씩 운전해 다니면서도 한 번도 힘들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이들은 그렇게 이리저리 부딪히고, 다치고, 치유하면서 자라났다. 걱정과 한숨으로 지내던 온실 속의 화초였던 모범생 출신 엄마도 그들과 함께 단단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