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디씨 근처 북 버지니아에는 나처럼 발령받은 남편을 따라온 부인들이 많았다. 모두 회사에서 인정받고 미국의 수도로 파견 나온 남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들은 꼬리를 편 공작새처럼 자신을 드러냈다. 그때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캐묻지 않으면 적당히 자신을 미화할 수도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들의 화려한 경력을 듣고 주눅이 들 지경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보니 한껏 부풀렸던 포장이 벗겨지고 민낯이 드러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비교적 시간이 많은 타지에서 자주 보다 보면 영혼의 실체가 저절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실제로 누구인가는 감추거나 꾸미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는 부지불식간에 그것을 드러내며, 내가 주장하는 사상이나 철학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행동이 나에 대해 가장 잘 말해준다.'라고 시인 류시화가 말하듯이.
그들은 이름보다는 누구의 부인으로 불리고, 남편의 직위로 각각의 위치(?)가 정해졌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사람끼리 모임을 결성하고 각종 정보를 나누고 교제했다. 배우자의 직업에 따라 부인들의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은 흥미로웠다. 특파원 부인들은 기자 성향을 닮아 솔직하다 못해 거침없이 말하고(욕을 구성지게 하는 사람도 있었다), 공무원 부인들은 서로 존댓말을 쓰고 남편의 얼굴에 누가 되지 않게 조신했다. 기자 부인들은 나이를 따져 언니, 동생으로, 동갑끼리는 ‘야’라고도 불렀다, 공무원 부인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남편의 지위가 높으면 자기보다 나이가 어려도 사모님이라고 깍듯하게 불렀다. ‘기사는 기자가 아니라 그 부인이 쓴다’라고 대담하게 말하는 기자 부인이 있는가 하면, 남편의 출세는 부인의 내조에 달려있다고 믿고 상사 부인을 하늘처럼 모시는 공무원 부인도 있었다.
성당에는 두 그룹이 있었다. 터줏대감인 교포와 몇 년 머물다 가는 주재원이다. 미국 시민으로 살면서 앞으로도 성당을 다닐 사람은 잠시 와서 쇼핑이나 하고, 돌아가 연락도 잘하지 않는 사람들이 반가울 리 없지만, 성당 교우라고, 동포라고 진심으로 대해주었다. 그들 중 큰 집에 사는 교포들은 종종 주재원들을 초대했다. 작은 타운 하우스를 빌려 사는 주재원은 덕분에 미국 중상류층의 주택을 구경했다. 나의 대모님 집은 차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야 나오는 저택이었다. 거실은 목소리가 울릴 만큼 넓고, 반지하에는 수십 명이 들어갈 만한 경당이 있었다. 사슴이 나타나는 깊은 숲으로 둘러싸인 성 같은 집에 들어가면, 나는 신데렐라가 유리구두를 신고 궁에 가는 것처럼 긴장되었다.
봄이면 사순절과 부활절, 여름에는 성모 승천 축일, 가을이면 핼러윈과 추수 감사절, 겨울에는 성탄과 동방박사가 방문하는 에피파니 축일까지 성당 행사를 준비하다 보면 1년이 지나갔다. 나는 성모회와 레지오 마리에 단원으로 성당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봄을 알리는 수선화가 연노랑 꽃을 피우면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시기를 맞아 '십자가의 길' 기도문을 바쳤다, 성탄만큼 기쁜 부활절에는 달걀을 삶아 그려 팔아 성당 기금을 마련했다. 여름방학이 시작하고 방학인 아이들을 열심히 실어 나르다 보면 8월 15일 성모 승천 축일을 맞아 성모님 머리에 올릴 화관을 만들었다. 화관을 쓴 성모님 앞에 커다란 장미꽃을 바치면 성모님에게서 꽃향기가 났다. 아이들이 새 학기를 맞는 가을, 선선한 바람이 불면서 여기저기에서 국화와 호박이 보인다. 집 앞에 온갖 종류의 서양 귀신이 등장하고, 호박 등불이 밤을 밝히면 집을 찾아오는 귀여운 아이들에게 줄 캔디를 사둔다. 성당 앞 로즈파크에 은행나무가 샛노랗게 변하고 떨어져 거리를 다시 노랗게 채우면 아이들이 추수 감사절 방학을 보내러 돌아온다. 미국에 오래 살아 그들의 풍습에 익숙한 분들이 크랜베리 소스를 얹은 터키 고기를 먹으러 오라고 부르면 우리는 감사히 찾아가 함께 이국의 명절을 축하했다.
크리스마스 장식이 집마다 번쩍이면 성탄 시즌이다. 미국인들은 세일을 찾아다니며 선물을 준비하고,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든다. 성당에서는 성탄 전 주일 저녁을 정해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었다. 성모회는 빨갛고 초록색을 넣은 케이크 같은 성탄 음식을 준비하고, 구역마다 장기 자랑을 연습해서 발표했다. 1등상 받겠다고 열심히 연습하면서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교우들과 더욱 돈독하게, 소원하게 지냈던 사람들과는 조금 더 다가가서 성당 공동체의 결속을 다졌다. 빨간 고깔모자나 반짝이는 조끼 같은 의상을 입고 캐롤을 부르면서 우리는 쑥스러우면서도 즐거웠다.
동방박사가 예수님을 찾아오는 주님 공현 축일이 되면 크리스마스 트리를 거둔다. 이날 미사에서 주는 분필로 문간에 세 분의 박사님 이름(Balthasar, Melchior, Gaspar)을 쓰면 한해의 액운을 막는다고 했다. 나는 아이들이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세 성인의 이름을 정성 들여 썼다.
성당 행사를 준비하면서 교포이건, 주재원 부인이건 개성이 강한 사람들은 의견이 맞지 않아 불편할 때도 있었다. 작은 공동체에서도 송곳같이 튀는 사람들이 꼭 있어서 상처를 주기도, 받기도 했다. 성당에 처음 갔을 때, 교포도, 기자 부인도, 공무원 부인도 아닌 나는 존재감이 없어 어리둥절했다. ‘누구 부인’이라는 타이틀로 통하는 사회에서 나는 무명이었다. 그렇다고 과장하고 잘난 척을 하며 으스댈 만한 용기도 없었다.
나는 미사에 착실하게 참석하고, 봉사하면서 차차 나의 자리를 찾아갔다. 진심을 알아주는 좋은 친구를 사귀고, 마음이 맞는 자매 같은 언니, 동생이 생겼다. 그들과 나눈 수많은 추억은 포토맥강과 함께 흘러갔다. 우리는 함께 미사를 드리고, 걷고, 밥을 먹으면서 진솔한 관계를 이어갔으며 지금도 좋은 인연으로 남아 있다.
6년의 꽉 찬 버지니아의 시간을 마무리하는 동안 성당에서, 혹은 동네에서 친하게 지내던 분들이 송별회를 여러 번 열어주었다. 나는 대모님이 마련해준 맨 마지막 파티에서 다시는 오지 않을 황금같이 소중했던 시간이 아쉬워서 엉엉 울었다. 미국에 다시 방문할 수도 있고 한국에서 또 만날 수도 있는 친구들이지만, 거기서 그 시간을 같이 할 수 없다는 회한이 눈물로 쏟아져 나왔다. 나는 그때 슬픔이나 아쉬움이 아니라 충만함에서도 눈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PS) 이것은 20년 전, 나의 사적인 체험이고 느낌이다. 지금 그 공동체의 구성원이나 분위기도 아주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