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5주기.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생일 축하합니다.
고등학생 2학년 4월 16일, 나와 같은 나이의 학생들이 선박 침몰 사고로 숨졌다는 뉴스를 봤다.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기에 어안이 벙벙해 한참 후에야 감정이 들었다. 마음이 '턱'하고 막혀왔다. 전국 각지에서 자원봉사자들이 팽목항을 찾았지만 나는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두 달 즈음이 지나서야 용기를 내 팽목항을 찾아가기로 결심한 나는 애도의 한 방식으로 해남에서 팽목항까지 50여 km에 이르는 길을 걸어갔다. 부슬부슬 비가 와 으슬으슬 추웠고 나는 희생자들을 생각했다. 알량한 추위가 미안하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어스름한 저녁 팽목항에 도착했고 자원봉사 접수 부스를 찾아갔지만 완곡하게 거절당했다. 유가족분들께서 자식 또래의 아이들을 보면 유난히 힘들어하신다는 이유였다. 그때는 너무 어려서 배려가 용기를 따라오지 못했다. 돌아갈 차편이 없던 와중에 천주교 부스에 계시던 수녀님의 배려로 천주교 부스에서 하루를 묵을 수 있게 됐다. 그곳에서 많은 자원봉사자분들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 그중에서도 시신을 수습하시는 잠수부 자원봉사자분과의 대화는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시신을 수습해서 보면 하나같이 손끝의 살점이 다 떨어져 있었다며 '그 어린것들이'하고 얘기를 잇지 못하셨다.
(팽목항 끝자락에 위치한)기억의 등대에 이르는 길에 이르는 난관에는 추모의 글이 적힌 수많은 노란 리본이 묶여있다. 그 글귀 하나하나를 보고 나니 그제야 이 참사가 실감이 났다. 등대에 도착하고 나서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울었다. 당시의 감정은 한참이 지나도 글로 풀어내기가 어렵다. 어쩌면 영원히 풀어낼 수 없을 것이다. 일말의 죄책감, 일말의 부끄러움 그리고 이 모두를 뒤덮는 깊은 슬픔. 그로부터 5년이 지났고 영화 <생일>을 보게 됐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 나는 몰랐다. 그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올해 23번째 생일을 맞이한다는 사실을. 오늘은 그들의 23번째 생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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